한옥자 수필가

[충청칼럼] 한옥자 수필가

살기가 팍팍하던 어린 시절, 아침이면 집마다 안주인의 악다구니가 대문 안팎을 넘나들었다. 두부 장수 종소리 덕분에 안주인들은 잠깐 소리를 멈추기도 했지만, 분이 사그라질 때까지 기세는 멈추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바깥주인들의 소리는 모깃소리처럼 작았다. 아침부터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며 헛기침을 할 뿐. 다 그렇고 그렇게 올망졸망 살아가던 마을 사람들의 삶을 두고 누가 누구를 흉보거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일 따위는 없었다. 없이 사는 것에 남 탓을 하지 않았던 시대였으므로.

월사금을 달라고 조르다가 욕만 한 바가지 듣고 찔금거리며 돌아서야 했던 시절, 주전부리용 동전을 내놓지 않으면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앞집 정순이는 내게 비기면 양반이었지. 다 찢어진 푸르뎅뎅한 비닐우산으로 몸을 가리며 학교에 가긴 또 얼마나 싫고 부끄럽던지.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인터넷 따위도 없고 SNS도 없었으니 라디오와 12인치 텔레비전에서 듣고 보는 것이 전부인 줄만 알았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보여주는 ‘대한늬우스’를 보면서 공연히 애국심이 마구 솟았고 호외요, 호외라고 외치며 던지는 쪼가리 인쇄물을 손에 쥐면 신문의 위대함을 찬양했다.

이다음에 엄마가 되면 자식에게 소리를 지르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다. 밥은 고봉으로 퍼주면서도 책가방을 들고 돈을 달라고 하면 ‘왜 아침에 돈을 달라고 하냐’며 무서워지는 얼굴과 날카롭던 목소리. 그것이 삶의 막다른 골목에 갇혀서 지르는 비명이란 걸 어린 나는 알 턱이 없었다.

요즘 내가 딱 그렇다. 마구 소리라도 지르면 좀 낫지 않을까 싶으나 소리 지를 대상도 장소도 없다. 산에라도 올라가 ‘야호’라도 읊으면 좀 낫겠다만 무릎 고장이라 올라갈 수가 없으니 딱하다. 다 큰 자식에게도, 이웃에게도 함부로 말 붙이기가 어렵다. 정치 이야기를 함부로 꺼냈다가 말꼬리를 집힐까 봐 아예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신문을 봐도 울화가 끓고, 방송만 봐도 부글부글 끓는다. 어디든 가서 있는 힘껏 소리라도 질러보면 울분이 가라앉겠으나 그럴 장소와 대상이 마땅치 않으니 꾹 참을 수밖에. 참는 것도 습관이라더니 습관은 마마, 홍역보다 더 무섭구나.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화병이란 병이 있다고 한다. 화가 쌓이고 쌓여 몸이 답답해지면 생기는 병이라는데 울화병의 준말이기도 하다. 분노가 쌓이고 스트레스를 풀지 못하면 화병이 되고 억울하거나 한이 서리면 점차 병이 든다. 일종의 정신과 관련한 병명인데 이쯤 되면 정신병이나 다름없다. 정신병이 별거인가. 온전한 정신으로 살 수 없다면 누구나 정신병자인 것을,

문인들의 가을이란 살짝 ‘센티’해져야 제맛이다. 그래야 시인은 슬픈 시를 낳고 수필가는 훈훈한 산문을 낳는다, 나도 혹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해서 초가을 맞는 기쁨이 컸다. 그런데 두어 달째 울분이 일고 피로감이 쌓이니 글은커녕 화병만 나게 생겼다.

그러다가 악다구니보다 더 악다구니 같은 안도현 시인의 글을 보았다.

‘칼과 풀잎의 싸움이었다. 풀잎이 버티자 칼은 풀잎을 난도질했고 풀잎은 결국 스스로 목을 꺾었다. 슬픈 일이지만 슬퍼할 필요는 없다. 칼이 풀잎을 이긴 게 아니다. 칼은 머쓱해지겠다. 칼은 이제 해야 할 일이 없다. 칼은 풀잎의 뿌리를 보지 못했다. 풀잎이 칼을 이긴 것이다.’

슬픈 글이었으나 속이 시원했다. 악다구니를 쓰는 것보다 더 강한 외침이었다. 이 가을에 본 가장 슬픈 명문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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