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수요단상]  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헌신과 낭비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나의 것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물질이나 시간을 어떤 목적으로든 사용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때로는 헌신이라 부르고 때로는 낭비라고 부른다. 헌신과 낭비가 유사한 모습을 가지고 있기에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나 행동을 판단할 때 그것을 헌신이라고 봐야할지, 아니면 낭비라고 봐야할지 헷갈릴 때가 있다. 성경을 보면 예수가 어떤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아 식사를 하고 있는데, 그 때 한 여인이 다가온다. 그리고는 값이 비싼 향유가 들어 있는 옥합을 깨뜨려서는 그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붓는다.

이 모습을 본 어떤 이는 그 여인을 향해서 왜 이 값비싼 향유를 허비했느냐며 나무란다. 그러자 예수는 그 여인의 행동은 결코 낭비가 아니며 자신의 사역을 미리 예비하기 위한 헌신이었다고 말한다. 사실 이전까지 예수가 보여주었던 말과 행동을 생각해 보면 이와 같은 예수의 주장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예수가 가장 우선시한 관심사는 늘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위한 일이었다.

그는 늘 가난과 질병 때문에 사회적인 약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를 향해서 “왜 당신은 세리나 죄인 같은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하는가?”라고 묻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 9:12)

즉 자신의 사역은 늘 힘없고 병들고 가난한 자들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예수와 함께 있는 자가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향하여 그것을 그냥 쏟아버리지 말고 시장에 내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했더라면 더 좋지 않겠는가? 라고 말하는 상황에서 예수의 대답은 오히려 여인의 행동을 두둔한다.

이처럼 우리는 무엇이 참된 헌신이며 무엇이 낭비인지 쉽게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이 두 개념은 서로 가까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다른 누군가를 위한 헌신을 낭비라고 판단하여 그 일을 망설이거나 심지어 다른 사람의 헌신까지도 무의미한 낭비라며 비난한다. 그러나 사실 이 두 개념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무엇을 행할 때 그 목적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점에 있다.

부자 아버지를 둔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산을 미리 받아서는 그 돈을 다 가지고 집을 나가버렸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에게 받은 돈으로 매일매일 호화로운 삶을 살았다. 그러다 결국 그 돈을 다 써버리고는 거지꼴로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을 ‘탕자’라고 부른다. 그는 인생을 허비하고 아버지의 재산을 허비한 ‘탕자’이다. 왜 그런가? 그가 사용한 모든 시간과 물질, 그 인생의 목적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직 나를 위해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었더니 그것이 결국 ‘낭비’가 된 것이다.

그런데 앞서 살펴보았던 자신의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나 우리가 흔히 너무나 아름다운 ‘헌신’의 삶을 살았다고 인정하는 분들의 삶을 살펴보면 그들의 삶의 목적은 결코 자기 자신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시간과 물질이 낭비가 아니라 참된 헌신이 되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을 누구를 위해 사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내 자신만을 바라보는 인생은 결국 아무 의미가 없는 ‘낭비’밖에 되지 않는다. 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과 행복을 바라보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헌신’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 여러분이 계획하고 또 실행하고자 하는 그 일은 누구를 위한 일인가? 그 대상에 여러분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여러분 자신은 물론 타인의 행복과 유익을 함께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참된 헌신의 삶은 바로 그 지점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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