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정숙 수필가

 

[육정숙 수필가] 도심을 벗어난 11월의 풍경은 시야가 머무는 곳마다 가슴을 뛰게 한다. 촉촉이 젖은 도로위로 내려앉은 발갛게 노랗게 물든 단풍잎은 캘라그라피 글씨체로 쓴 한 줄의 아름다운 문장이요 온 산야 곳곳으로 펼쳐지는 깔들의 향연은 장편의 서사시 같다. 11월의 공간은 보이는 곳곳이 한 폭의 수채화요 한편의 시요 수필이다.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구체적으로 표현하려 애쓰지 않아도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먼저 뛴다. 그래서였을까! 가을은 누구나가 시인이 되는 계절이라고들 한다.

형형색색 단풍도 장관이지만 이 계절에 돋보이는 풍경이 있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 아래로 수형이 멋진 감나무에 달린 감들이 붉게 익어가는 모습이다. 복잡하고 빠르게 지나가는 요즘의 현실 속에서 잠시의 여유와 감성을 던져주는 감나무에서 희미하게 바래져 가는 사랑과 추억을 건져본다.

어느 봄 날, 장독대위로 하얗게 쏟아진 감꽃들이 햇살에 튄다. 그 고운 꽃들이 져야 열매가 자란다. 자연은 모든 물상들을 시간 속에서 성숙하게 하고 그 과정 속에서 바람과 빛의 담금질로 숙성을 시킨다.

어느 덧, 가을 햇살아래 처마 밑에서 어린소녀의 애를 태우던 곶감은 할머니의 다락방에 들어가 가끔씩 달랑 한 개씩만 나왔다. 한 개를 후딱 먹고 더 먹고 싶지만 할머닌 매일 한 개 씩만 다락방에서 나온 다고 했다. 할머닌 물질적으로 부족했던 삶을 동화 같은 이야기로 어린 심성을 달래 주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감나무는 오상五相, 오색五色, 칠덕七德을 지닌 나무라고 한다. 오상은 (문文 무武 충忠 절節 효孝)요, 오색은 (청靑 적赤 흑黑 황黃 백白)이라, 칠덕은 수명이 길고, 벌레가 없고, 녹음이 좋으며, 단풍잎이 아름답고, 날짐승이 집을 짓지 않고, 과일이 좋고, 낙엽은 좋은 거름이 된다하여 옛사람들은 감나무를 자손들의 번성과 풍요를 위해 울안에 심었다고 한다.

물질,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를 살아가지만 서툰 삶이 내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추억 하나 만들어 주지 못한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다. 비록 물질이 풍족하지 않은 시절이었지만 옛 어른들은 매사에 소홀함 없는 정성과 사랑으로 바라보고 기다려주는 넉넉함이 있었다. 요즘은 예전처럼 대가족이 모여 사는 것도 아니어서 가족 간의 관계를 통해 자연스럽게 익혀가던 전인교육의 기회조차 없다.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들에게 인성보다 지식이 앞선 교육이다 보니 서로에게 배려하는 모습들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물질, 문명이 점점 더 발달 되는 것이 가끔은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나이 드는 탓이려니.

하지만 많이 부족했고, 불편했고, 힘들었지만 조금은 느리게 가던 그 시절들이 더욱 생각이 난다. 마트에서 깔끔하고 예쁘게 만들어진 달달한 곶감을 한 줄 사 본다. 일상으로 바쁜 아들들이 언제 올지 모르지만 할머니의 다락방이 아닌 냉동고에 곶감을 넣어두었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