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광섭 청주대 겸임교수·로컬콘텐츠 큐레이터

 

[충청의창] 변광섭 청주대 겸임교수·로컬콘텐츠 큐레이터

지난 주말에는 가을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해발 360m의 피반령 고개를 넘어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피반령은 회인 북쪽 15리에 있는 고개로 고갯길이 아홉 번 꺾이어 가장 높고 위험한 곳'이라고 기록할 정도로 험준한 고개다. 붉게 물든 고개를 넘어 남하하면 회인면 소재지가 있다. 스쳐가기엔 너무도 소중하고 애틋한 마을이다.

마을 초입에 차를 세우고 골목길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어서 오라고, 참 잘 왔다며 붉게 빛나는 감들이 마중 나왔다. 나는 왜 감만 보면 흥분하는지 모르겠다. 지난여름, 대지를 뜨겁게 달군 태양과 몰아치는 태풍 속에서도 잘 버텼기 때문인가. 붉은 빛이 더욱 빛나니 침샘이 요동친다. 일본의 시인 나스메 소세끼는 ‘홍시여, 잊지 말게. 너도 한 때는 떫었다는 것을…’ 이라고 노래했다.

회인면 소재지에는 동헌과 회인객사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때 회인현청이 있던 곳이다. 행정의 중심, 문화의 중심, 교육의 중심이었으니 동헌에서는 현감이 지방행정을 총괄하고, 객사는 관사처럼 쓰였는데 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며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배례하였다. 회인향교는 세종 때 창건한 이후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곳이다. 사직단과 매곡산성·호점산성도 위치해 있다.

오장환문학관은 이 고장 출신의 시인 오장환의 문학세계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정지용의 제자이며 백석과 더불어 193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다. 마을 중앙에 양조장이 있다. 60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술을 빚었지만 최근에 영업을 멈추었다. 방앗간에서는 기름 짜는 냄새 가득하고 창고에는 사과를 출하하려는 농부들의 손길이 부산하다. 곶감을 만드는 것은 바람이라고 했던가. 그늘진 처마에 곶감이 주렁주렁하다. 드넓은 학교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이 땅따먹기 놀이를 하고 있다. 삶의 여백이 끼쳐온다.

이 마을 풍경의 절정은 돌담이다. 돌담의 돌들은 하나하나가 그 모양이나 크기, 색깔까지도 다르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조화롭다. 태풍이 와도 끄떡없고 세월이 지날수록 깊은 맛이 있다. 우리의 돌담은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의 의미만 있지 않다. 밖에서 안을 볼 수 있는 틈새로 가득하다. 사람의 어깨 높이만큼만 쌓아 올렸다. 돌담에는 호박 등을 심고, 바닥에는 채송화를 심었다. 마을의 풍경을 만들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상징이다.

오래된 마을은 지붕없는 박물관이다. 100년의 마을은 100년의 역사를, 1000년의 마을은 1000년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집집마다 애틋한 풍경과 기억을 담고 있으며 골목길마다 세월의 때가 묻은 이야기를 갖고 있다. 오래된 나무에는 신화와 전설이 있고, 마을 공터와 빨래터와 마을회관에는 공동체의 미덕이 담겨 있다. 마을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의 문화원형은 모두 마을에서 만들어졌다. 밥 먹을 때 쓰는 숟가락 젓가락 하나, 누워서 바라보는 대청마루의 서까래, 장독대와 외양간과 창살문과 부뚜막 모두 한국인의 마음을 그려낸 별자리가 있다. 한국인만의 디자인이며 조각이고 경전이다. 이 마을이 역사와 문화, 자연과 농경이 조화를 이루는 불멸의 마을이길 바란다. 이왕이면 도시민과 청년예술인들이 터를 잡고 함께 꿈을 빚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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