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수요단상] 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생명의 근원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과학 문명이 극적인 발전을 이룬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물음은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인류가 생명에 관한 물음을 가지는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보편적인 인간의 수명을 더욱 늘리기 위함이며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극복하고 소위 말하는 ‘영생’을 얻고자 함이다.

고대로부터 돈과 권력을 모두 얻은 위대한 인물들이 더 나아가 영생을 꿈꾸며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일화들은 너무나 유명하다. 수메르 신화의 길가메시나 중국의 진시황제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그들은 모두 인류가 누릴 수 있는 궁극의 힘과 재물을 모두 다 얻었지만 인류의 정점이라 부를 수 있는 그 지점에서 만족하지 못했다.

그들은 스스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더 높은 곳에 이르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런 그들의 염원이 결국 영생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졌고 이는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여러 전설과 일화 등을 남기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들 모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생명이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성경을 보면 그에 대한 답을 이렇게 진술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하나님이란 절대자가 땅의 흙과 생기를 합하여 창조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여기를 주목해 보면 고대 유대인들은 인간의 육체는 흙으로 이루어졌으며 껍데기에 불과한 그 육신을 살아 숨 쉬게 하는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생기’라고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고 믿었다. 즉 생명이란 인간의 손으로 어찌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이해는 인류의 번영과 유익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생명의 근원이 인간의 손에 떨어지는 순간, 우리가 겪게 될 변화의 흐름을 인간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근원을 주관한다는 것은 곧 생명이란 개념 역시 여러 다른 인간의 창조물과 같은 취급이 가능해 진다는 말이 된다.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모습으로 생명을 창조할 수 있다면 그와 같은 생명이 더 이상 존중을 받을 이유가 무엇인가!

생명의 가치는 바로 인간의 힘으로는 손댈 수 없다는 그 절대성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중세 시대 수많은 지식인들이 금을 창조하기 위해 몰두했던 ‘연금술’이 결국 실패로 끝났기에 오늘날에도 금은 세상 모두에게 사랑받는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금속으로 남아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생명 역시 인간의 한계와 능력을 벗어나 있기에 더 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하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존엄사’나 ‘낙태’에 대한 주제가 큰 이슈가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와 같은 논란의 핵심이 바로 생명과 연관된 일이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우리 인류가 아니라 절대자의 손에 있다는 믿음과 이해가 만들어낸 참으로 놀라운 결과인 것이다.

지금 여러분이 여러분의 손에 반드시 넣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내 손에 쥐어진 순간 그것이 어떤 사람이던 아님 어떤 물건이던 반드시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가? 때로 어떤 대상은 내 자신이 손댈 수 없는 바로 그 곳에 있기 때문에 내게 가치가 있고 또한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내 손에 쥐어지는 순간 우리 자신은 순간의 기쁨과 행복은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내 거대한 공허감과 실망감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생명은 그 자체로 ‘신비’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 신비를 어느 정도 밝히는 것이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이란 영역은 여전히 인류에게 있어 ‘신비’ 그 자체인 것 또한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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