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천 입시학원장

 

[목요사색] 정우천 입시학원장

사마천의 사기(史記)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에 장자(莊子)에 대한 일화가 있다. 초위왕이 장자가 현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를 재상으로 삼으려 사신을 보냈으나 장자가 거절한 이야기이다. 재물과 지위로 그를 설득했으나 장자는 제사에 쓰이는 소를 아무리 잘 먹이고 잘 대접해야 결국은 제물이 될 뿐이며 그때서 후회해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다음의 말을 남긴다. ‘我寧游戱汚瀆之中自快 無爲有國者所羈’(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즐거워할지언정, 제후들에게 구속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속적인 부귀나 입신양명보다 스스로가 진짜 즐거울 수 있는 삶을 살겠다며 그는 자쾌(自快)를 말한다. 일국의 재상이 되고도 남을 능력이지만 스스로 선택한 삶을 기꺼이 즐기겠다는 자세다.

‘모두가 용이 될 수 없으며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 더 중요한 것은 개천에서 붕어, 개구리 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한동안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모 인사의 SNS 글이다. 장자가 살고자 했던 무소유의 삶과 다를 바 없는 삶의 자세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글은 많은 젊은이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질책의 대상이 되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자신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던 언행의 불일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같은 유형이 삶이 어떤 경우에는 본받고 싶은 삶이 되고 어떤 경우에는 기피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

과학적 사실이나 객관적 진실 등에 관한 의견 차이는 사실이 확인되면 서로 논쟁 중에서도 즉시 수긍하게 되고 뒤끝도 그렇게 크게 남지 않는다. 물이 몇 도에서 끓느냐, 혹은 어느 산이 더 높으냐는 등과 같은 다툼이 그렇다. 답의 확인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고 그러고 나면 쉽게 논쟁이 정리된다. 그러나 가치판단의 문제나 감정이 개입된 정치적 논쟁 등은 옳고 그름을 가리기도 쉽지 않고 논쟁이 끝나도 승복은커녕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희로애락 같은 감정적인 것에 대한 평가도 그처럼 객관화가 어렵다. 감정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으며, 대부분 주관적 해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같은 일을 가지고도 각자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르다. 누군가에게 절실히 하고 싶은 일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고통일 수 있으며, 이는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문제의 핵심은 자발성에 있는 것 같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해서 개천의 붕어로 산다면 그것 또한 즐거운 삶일 것이다. 그러나 용이 되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개천의 붕어로 산다면, 그 삶은 괴롭고 고단한 삶일 수밖에 없다. 무엇으로 사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떠한 마음으로 사느냐일 것이다. 목이 마른 자에게 주는 물은 축복이지만, 물고문 받는 자에게 주는 물은 악몽과 같다. 자발적이고 스스로 선택해서 사는 삶만이 진정한 축복이다. 꿈과 희망 그리고 도전을 포기한 채 소확행(小確幸)을 즐기노라는 젊은이의 무기력한 정신승리나, 이루지 못한 삶에 체념한 자신을 세상사에 통달한 현자인 양 위장하는 비루한 늙은이의 삶이 자쾌(自快)일 수는 없는 일이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