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수필가

 

[백목련] 이향숙 수필가

초록 산이다. 음영의 표현이 잘된 수채화 한 폭이다. 무겁고 탄탄한 것부터 한주먹거리도 되지 않는 설렁설렁 한 것까지 크기와 모양 따라 쌓여 있다. 어려운 시절에는 줄을 서서 얻어갔을 우거지는 상자에 담아 밭으로 보내도 배추가 팔려 나가고 나면 그만큼 다시 쌓인다. 시월 말부터 시작된 김장은 설이나 추석 명절보다 대목이다. 물량도 많이 나가지만 기간도 길다.

자식들이 오기 전 준비를 서두르는 노파는 손수 농사지은 배추로 담근다며 양념꺼리를 흥정한다. 갓, 쪽파, 양파, 생강을 가량 하란다. 혹시 빠진 것이 없는지 카트에 의지해 매장을 한 바퀴 돌고 마늘, 젓갈, 북어대가리를 찾아내라 채근한다. 뒤돌아서면 빠진 구멍이 보인다며 김장비닐과 가져가면 되돌아 올 줄 모르는 김치 통을 고른다. 아들며느리 타박하는 소리가 꼭 내 부모가 하는 듯 하여 움찔한다. 이번엔 고쟁이 주머니에 숨겨 두었던 꼬깃꼬깃한 지폐를 꺼내 손주들 좋아하는 과일을 흥정한다. 수육거리도 서너 근 장만한다.

어느 해부터인가 김장철 그림이 많이 바뀌었다. 배추를 절이는 과정이 아파트 생활에 불편하여 아예 절여서 판매하는 업체가 우후죽순으로 늘어났다. 인근에 주택도 많지만 아파트도 꽤 들어서 있어선지 절임배추 문의가 상당하다. 지역에서 나오는 상품으로 연계를 해주고 싶어도 산수가 아름답고 물 맑은 곳에서 출하하는 제품을 선호하여 어쩔 수없이 예약제로 운영할 수밖에 없다. 마진율을 줄이고 판매하다보니 고객이 먼저 양념꺼리를 주문해주어 그럭저럭 고생하는 보람이 있다. 입소문을 타고 먼 길을 찾아오거나 배달 부탁을 하여 더없이 감사한 마음이다.

바다가 가까운 두메산골이었던 고향에서 김장하는 날은 잔칫날 같았다. 아주머니들이 부엌에서 광목앞치마를 두르고 김장을 담그느라 석기래가 들썩였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무를 큼직하게 썰어 넣고 동태찌개나 물 잠방이를 한 솥 끓이기도 하고 돼지고기에 약재를 넣어 푹 삶아 내었다. 어머니가 금방 버무린 배추김치에 돌돌 말아 입에 넣어주었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먹을거리는 따로 있었다. 물고구마를 가마솥에 삶고 밑불을 놔두면 고구마에서 물엿처럼 달큰한 것이 솥바닥에 흘러나온다. 고구마를 떼어내면 쩌억하는 소리와 당분이 거미줄처럼 따라 올라온다. 겉절이 중에서 노란 속잎을 얹어 먹으면 천상의 음식을 먹는 듯 했다. 생각만으로도 입맛이 다져진다.

해마다 올해는 꼭 내손으로 김장을 해보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김장꺼리를 판매하다보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다. 남의 집 김장에 늦가을은 겨울이 되고 집안 살림은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해마다 내년을 기약 할 수 없다며 병약하신 시어머니가 아쉽지 않게 보내주신다. 친정언니가 담가주기도 하고 이웃이 맛이나 보라며 나누어 준다. 얻은 김치가 냉장고를 가득 채워 더 이상 들어 갈 곳이 없다. 한해 살림을 갈무리하여 든든해진 마음을 겨우내 꺼내 먹고도 남아 묵은지 만들 여유가 생긴다.

김장철의 마무리 단계이다. 배추산도 민둥산이 되었다. 긴장이 풀린 육신을 뜨근한 아랫목에 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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