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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로 저널리즘의 테러안용주 선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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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2.03  14:5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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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며] 안용주 선문대 교수

20대의 젊은 연예인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안타까운 일이 또 발생했다. 가장 큰 원인을 익명으로 쓰는 악플로 보고 있다. 한편 여의도에서는 어린이의 안전을 지키고자 내놓은 법안이 공익보다 정파적 이익을 위한 정쟁의 소용돌이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

현대인은 수많은 미디어가 쏟아내는 어쩔 수 없는 정보 홍수 시대에 살고 있고, 쏟아지는 정보는 옳고 그름 보다 취사선택의 문제로 치부되는 사회가 되었다. 옳고 그름의 정의 또한 시대변화에 따라 기준이 다르게 적용되고, 사회 정의의 기준점을 위해 만든 기관조차도 때와 장소에 따라, 형편에 따라, 대상에 따라 기준을 달리하다 보니 이전의 가치가 부정한 것이 되고, 부정한 행위나 행동으로 치부한 재산과 권력 또한 취사선택에 따라, 제시하는 기준에 따라 판단이 요동친다.

우리가 시중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공인(public figure)의 범위는 어디까지 일까?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공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되어 있지만, '공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는 개념도 모호하다.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일하는 사람’으로 한정지을 수도 있지만, 이 또한 거리가 있다. 우리는 종종 스포츠선수, 연예인, 가수 등도 공적인 존재라며 그들의 일상을 무자비하게 파헤치고, 비난하고, 자신의 관점으로 재단하는 것을 서슴치 않는 일종의 관음증에 동원된다. 그들은 국민의 세금으로 공적인 일을 하지 않음에도 공인이라는 이름으로 사생활을 포기해야 한다는 논리로 접근한다.

그러나 모든 스포츠인, 연예인이 대상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무명선수, 무명가수에 대해서는 누구도 공인이라는 레테르를 붙여주지 않는다. 영어사전에서는 '그 사람의 삶과 행동이 강렬한 대중의 관심과 감시의 초점이 되는 유명한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도대체 공인이라는 기준은 누가 정하고 있는가?

현 시점에서 공인의 기준은 '언론과 미디어가 관심을 갖는 존재'라고 정의하는 것이 가장 근사하다. 비록 미물이라 할지라도, 비록 존재 의미조차 희미하더라도 언론과 미디어가 초점을 맞추는 순간, 더 이상 사인(私人)일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 이후에는 끝없는 검증과 비판과 관음증의 대상으로 자리메김하고, 끝없는 대중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노리개(?)로 전락하고, 그들은 국민 아무도 말하지 않는 '알권리'라는 희생물로 전락한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공인의 기준을 세우는 것은 언론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7080세대에 익숙한 황색언론은 원시적 본능을 자극하고, 흥미본위의 보도를 함으로써 선정주의적 경향을 띠는 저널리즘을 가리킨다.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인간의 불건전한 감정선을 자극하는 범죄, 괴기사건, 성적 추문 등을 과대하게 취재 보도함으로서 공익보다는 선정성 경쟁에 입각해 기사를 작성하거나, 팩트 파악에 소홀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포털이 뉴스의 취사선택을 좌우하고, 클릭수를 경쟁하는 환경으로 바뀌면서 언론사 홈페이지는 황색언론에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선정적으로 변한지 오래다. 말하자면 황색언론이 이 시대의 공적인 가치기준을 세우는 시대가 되었고, 그들이 뽑아내는 기사제목에 민심이 널뛰는 느낌이다. 옥석(玉石)을 구별할 수 있는 깨어있는 시민의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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