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4장 소슬바람으로 바느질을 하며

▲ <삽화=류상영>

"우리츠름 아는 거 읎고 무식하게 농사나 짓고 사는 놈들이 팔자 좋게 냘 걱정하믄서 살 수 있대유? 당장 오늘 하루 먹고사는 것도 힘든데?"

황인술이 따라 준 술을 단숨에 비워버린 윤길동이 술잔을 김춘섭에게 돌리며 말했다.

"지달려봐. 이승만대통령이 우리츠름 농사꾼들도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을 맨들어 준다고 했응께."

황인술은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김춘섭의 잔에 넘치도록 술을 따라주었다.

"맞아유. 냘 당장 먹을 끼니가 읎드래도 희망을 안고 살아야지. 희망이 읎으믄 죽은 목숨하고 머가 다르겠슈."

"그려, 우리가 언지는 배뚜드리믄서 살았남? 있으믄 있는데로 없으믄 읎는데로 살았지."

윤길동은 술에 취하니까 더웠다. 저고리 고름을 풀어 재꼈다. 겨드랑이로 파고드는 바람이 시원했다. 막걸리를 잔뜩 마셔서 맹꽁이처럼 블록해진 배를 두들기며 기분 좋게 말했다.

면장댁의 대청마루에 전등불이 꺼지면 지붕위에 낮게 엎드려 있던 달빛이 마당으로 미끄러져 내려온다. 달빛이 마당위에서 바람을 따라 고고하게 춤을 추기 시작하면 기다렸다는 듯 뒷산에서 소쩍새 울음소리가 들창문을 두들긴다.

대청마루의 불이 꺼진지 오래지만 옥천댁의 방은 불이 꺼지지 않았다.

방안에는 30촉짜리 알전구가 천장 가운데 매달려 있어서 방안이 환했다. 옥천댁은 아랫목에 이불을 깔아 놓고 다소곳한 자세로 앉아 배냇저고리를 만들기 위해 바느질을 한다. 바느질을 하다 갑자기 무언가 잃어버린 사람처럼 고개를 들어서 거울을 본다.

거울 안으로 보이는 옥천댁의 둥근 얼굴은 표정이 없다.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눈매는 무심해 보이기도 하면서 한없이 깊어 보인다. 그 깊은 눈 안으로 들어가면 무한한 슬픔 덩어리가 묻혀 있을 것 같은 눈매처럼 보이기도 했다.

저 얼굴이었을까?

그 때나 지금이나 친정이 넉넉한 살림은 아니다. 처녀 때 얼굴을 단장하느라 있는 집 자식들처럼 눈썹을 그리고 얼굴에 크림을 바르고 입술에 연지를 바르지 않았다. 그 탓에 거울을 자세하게 들여다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일까, 열아홉 살에 결혼을 하고 십육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거울 안으로 보이는 얼굴은 처녀 때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람, 대체 머가 변항겨?

옥천댁은 한참동안이나 거울을 바라본다. 얼굴은 처녀 때와 똑같아 보이지만 처녀 때와 조금도 닮지 않은 여자가 거울 안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뒤안에서 바람 소리가 들리면 거울 속에 여울이 지고 눈매 고왔던 처녀의 얼굴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 대신 외로움에 지쳐 있는 중년 여자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변하긴 변했구먼.

옥천댁은 쓸쓸히 웃으며 다시 바느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배냇저고리를승철이 것을 포함해서 네 벌이나 만들었다. 그래도 매번 처음 만드는 것처럼 긴장이 되고 바느질을 하는 한땀 한땀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옥천댁은 첫째 딸인 애자의 배냇저고리는 만들지 않았다.

아기 때 입던 옷을 시집 올 때 가져와서 장롱 깊숙이 간직하였다가 꺼내 입혔던 까닭이다. 그건 친정어머니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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