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표 서원대 교수

[내일을 열며] 이광표 서원대 교수

오랜만에 조광조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다. 16세기초 신진 사림의 리더로, 도덕적 왕도정치 이상주의를 추구하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던 조광조. 사람들은 그를 두고 흔히 “실패한 개혁가”라고 한다.

1519년 기묘사화로 실각한 조광조는 전남 화순군 능주면으로 유배를 갔고 곧이어 사약을 받았다. 그의 나이 서른일곱. 그 현장엔 지금도 적려유허비(謫廬遺墟碑)가 있다. 유허비 옆에는 비문의 내용을 쉽게 풀어쓴 안내판이 있다. 그 가운데 이런 내용이 나온다. “아 저 남곤, 심정, 홍경주의 무리들은 과연 어떠한 사람들인고.…기묘년 11월에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이 밀의하여 주초위왕이 왕이 된다는 무근지설을 조작하여 변을 일으켜 변고가 일어나 즉시 이곳 능주에 유배되니…” 이 유허비는 1667년에 세웠고 문장은 송시열이 지었다. 유허비는 훈구파를 비판하고 조광조 등 신진 사림들의 개혁정신과 도적주의를 추앙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남곤, 심정, 홍경주는 기묘사화를 주도해 조광조 등 신진사림을 숙청한 훈구파의 주역들이다. 기묘사화에 이르는 과정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이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이다. 당시 홍경주의 딸은 중종의 후궁이었다. 홍경주가 딸을 끌어들여 중종과 조광조를 이간질하고 급기야 주초위왕 사건까지 기획한 것으로 사람들은 보고 있다. 물론 주초위왕 사건이 실제 있었는지를 두고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그럼에도 주초위왕 사건이 사실이라면 조광조가 왕이 될 것이라는 얘기는 거짓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조광조를 밀어내기 위해 훈구파가 꾸며낸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때마침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홍경주의 묘를 찾아갈 일이 있었다. 무덤 초입에 그를 기리는 사당이 있는데 그 앞에 문중에서 세운 신도비가 있다. 그 내용이 흥미롭다. 이런 대목이 나온다. “조광조의 마음이 옳더라도 궤격(詭激)이 버릇이 되어 이렇게 되었으니 사습을 바로잡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이들을 죄주었던 것이며 이들을 제거하라는 밀지나 밀유(密諭)는 없었으며…” 세간의 비판을 의식한 듯, 조광조를 음해했다는 지적에 대해 다소 해명하는 내용이다. 훈구파가 권력을 위해 기묘사화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신진 사림의 급진 개혁의 부작용을 막기 위한 불기피한 선택이었음을 은근히 강조하는 것이다.

조광조 유허비의 내용과 홍경주 신도비의 내용에는 이런 간극이 있다. 조광조를 지지하는 사람이나 홍경주 후손의 입장에서 보면 그 차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역사적 사실과 별개로 그것을 보고 평가하는 방식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광조는 이상과 원칙을 중시했던 개혁정치가였다. 여기에는 이론이 없다. 하지만 그 과정을 놓고 이견이 있다. 그의 개혁이 지나치게 급진적인데다 실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해 결국 좌절하고 말았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역사에 대한 평가가 하나일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조광조의 삶과 죽음은, 그에 대한 평가의 간극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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