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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당크레파스김애경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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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2.17  15: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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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애경 수필가 

빈방에 불을 켜면 하나둘씩 기억의 등이 켜지기 시작한다. 유난히 조물조물 만들고, 꾸미기를 좋아했던 두 딸 덕분에 말 그대로 잡동사니 부자였던 공부방이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고 나니 어릴 때 쓰던 물건들이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다. 버리려고 꺼내서 뒤적이다 보면 곳곳에 흔적들이 남아 있어 어느 때는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눈길을 빼앗길 때가 있다. 방 한편의 책장에는 아직도 아이들의 어린 시절이 그대로 꽂혀있다.

특히 일기장이나 독서 노트가 그렇다. 그때는 모든 말과 행동들이 철없다고만 생각했었다. 다시 읽어보니 기발함과 그 또래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엉뚱 발랄한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가끔이지만, 독립해 나간 딸들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이 시간이 좋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이 쓰던 물건들은 어느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남편은 집안 어지럽게 쌓아두고 있다고 핀잔을 주기도 하지만, 잔소리와 눈총을 달게 받을 만큼 소중한 공간이다 .

오늘은 우연히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 쓰던 크레파스 뚜껑을 열었다가 시선이 머문다. 한 케이스에 들어 있는데도 어떤 색은 몽당이가 되어 있고 어떤 색은 아직 새것처럼 심지까지 꼿꼿하게 세우고 있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수없이 보았던 장면일 텐데, 내 눈길을 오래도록 사로잡는다. 키 크고 폼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보다 몽당크레파스에게 더 마음이 가는 이유는 또 뭘까?

나름대로 잘 커주는 아이들을 보면서 욕심을 냈었다. 자기의 길을 잘 달리고 있는데도 ‘그만하면 충분해’ 박수를 쳐주기 보다는 더 뛰어보라고 채근을 할 때도 있었다. 뒷집 아이와 비교하고, 옆집 아이와 경쟁하게 했고, 앞집 아이처럼 달리라 했었다. 그때는 그것이 엄마로서의 뒷바라지였고, 당연한 간섭이라고 생각했었다. 연필로 꾹꾹 눌러 쓴 일기장을 읽어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나는 참 잔소리 많은 엄마였던 것 같다. 숙제했냐? 일기 썼냐? 공부해라. 빨리해라. 잘해라…….

수능 막바지쯤, 자정이 넘는 시간에 독서실을 나오던 딸과 걷던 가로등 불빛이 선명하다. 어떤 위로의 말도 사족이 될 것 같아 말없이 그림자만 부추기고 걷던 애잔한 귀갓길. 최선으로 공부했고 나름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많은 스펙들을 쌓으며 노력했지만, 소위 명문대에 진학하지는 못했다, 한때는 더 열심을 내지 못한 아이들이 원망스럽기도 했고, 좀 더 뒷바라지 못 해준 부모로서의 자책감 때문에 힘겨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달랐다. 처음 스케치한 대로는 아니지만 지금 그려지고 있는 자신들의 환경을 탓하지 않고 인생이라는 도화지를 채워가고 있다. 잔소리 많은 엄마 밑에서 피라미드의 꼭대기만을 추구하며 살았다면 아마도 아이들의 삶은 지금처럼 평온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을 것이다. 몽당이가 된 크레파스처럼 딸들도 꿈을 이루기 위해 자기만의 색깔로 열심히 제 몫을 담당하고 있음에 대견함을 넘어 감사한 마음까지 드는 밤이다.

어수선한 시국이다. 시시비비를 가리기 이전에 각자 삶의 모양새를 비춰 보는 시간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자식을 키우는 일이든, 인생을 설계해 가는 일이든 욕심내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잔뜩 날을 세우고 살다 보면 모양새는 꼿꼿해 보일지라도 누군가에게 곁을 주기도, 함께 걷기도 버거운 삶이 될 것이다. 불을 끄고 나오는데도 그 생각만은 선명해져 온다.

한 번쯤은, 우리 마음속에 쓰지 않고 잔뜩 날 세우고 있는 모난 부분을 조심스레 꺼내 인생의 한 페이지를 따뜻하게 색칠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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