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전 청주고 교장·칼럼니스트

[김재영 칼럼] 김재영 전 청주고 교장·칼럼니스트

오랜만에 시가지를 지나 무심천에 이르렀다. 반짝이는 불빛 속에 무심천은 유유히 흐르고 초승달이 떠 있다. 달빛 속에 지난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10대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 손을 잡고 처음으로 청주역에서 북문로로 들어서자 "무지개 타고 가는 하늘의 황금마차...."란 노래가 전축을 통해서 흘러나오고 코흘리개 시골 소년이 청주 땅을 밟은지 반백년이 훨씬 지나 고희(古稀)의 나이를 넘긴지 오래이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러 어머님 손을 잡고 두 번째 청주 땅을 밟고 입학시험을 치는데 하루 종일 밖에서 떨고 계셨던 자식 사랑이 유별나신 어머님, 청주고 재학시절 하숙집에 들리시어 자식에게만 국밥 한 그릇 사주시고 먹는 모습을 지켜보시던 아버지, 아들이 모교인 청주고 교사로 발령 나자 기뻐하시던 어머니께서는 아들이 모교 교장이 된 모습을 보지 못하시고 21년 전 저희들 곁을 떠나셨으니 가슴이 아프다.

공자는 3000가지 죄악 중에서 불효(不孝)가 가장 큰 죄라고 했고, 시경(詩經)에 나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의 은혜를 생국지은(生菊之恩)이라고 하며 불경의 부모은중경에 부모의 은혜를 10가지 들고 있다. 어머니가 출산 할 때에 3말 8되의 피를 쏟고, 기르는 동안 8섬 4말의 젖을 먹인다고 한다. 왼쪽 어깨에 아버지를,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를 업고 수미산(須彌山)을 천번  돌아도 갚을 수 없는 것이 부모의 은혜라고 했다.

50년대의 어려웠던 시절, 7남매를 위해서 공직을 사퇴하신 후 자식들을 위해서 밤을 낮 삼아 열심히 살아오신 부모님의 노력으로 자수성가 하시어 7남매는 구김살 없이 성장했다. 청주고 1학년 시절(지금의 청주중 자리), 봄철이면 벚꽃이 만발한 비포장도로인 무심천을 걷고, 달 밝은 밤이면 무심천 제방에 앉아서 청운의 꿈을 품고 내일을 설계하곤 했다.

1960년 9월에 사창동 소재 원형건물로 옮겨 1961년 졸업을 하고 70년대 후반에 복대동으로 옮긴 청주고에서 교사(5년)로 근무했고, 이어 청주여고(3년)에 근무하다보니 제자들인 부부들이 여럿 있다. 2002년에 청주고 교장으로 부임하여 2003년(癸未年)에 평소에 마음에 두고 있던 후한서(後漢書)에 대장부당웅비(大丈夫當雄飛)라고, "웅지(雄志)를 품고 비상(飛上)"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개교기념일에 '웅비(雄飛)'라고 26대 교장 필자가 직접 써서 체육 대회 주관기인 57회 제자들이 웅비(雄飛)石을 세웠다. 청주고 상징물인 교비(校碑)로 등재되어 현관 옆에 세워져 있고, '청주고총동문회-작은쉼터-김재영칼럼'을 1350회 연재중인데 25만명 조회로 고마운 마음이다.

증자(曾子)는 효자자백행지선(孝慈者百行之先)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온갖 행실에 앞선다"고 했다. 늘 가정이 소중함을 느끼며 내게는 남달리 고생해 오신 부모님이 계셨고, 모교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음에 감사드리며 새해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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