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의보 충북교육학회장·교육학 박사

[충청의 창] 심의보 충북교육학회장·교육학 박사

삶 속에서 삶을 통하여 삶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다. 삶의 주체는 사람이다. 따라서 교육은 사람과 삶을 가르치는 일이다. 사람이란 나와 타인, 즉 너이다. 너로 인해 나를 알고 나로 인하여 너를 안다. 나와 너는 독립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함께 있을 수밖에 없는 공존의 대상이기도 하다. 삶은 ‘나와 너’가 함께 이루는 현상이다.

삶의 교육에는 문제가 있다. 너와 나는 다 같은 사람이지만 아는 방법이 다르다. 너에 대해서는 인식할 수 있지만, 나에 대해서는 자각할 수밖에 없다. 너는 앎의 대상이지만, 나는 깨달음의 대상이다. 알았을 때에는 너에 대한 앎이지 나에 대한 자각이 아니며, 깨달았을 때에는 나에 대한 깨달음이지 너를 깨달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교육이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사람임을 깨닫고 사람답게 살도록 가르치는 일이라면 사람이 무엇이고 삶이 무엇이냐, 나와 너는 누구이며 삶을 이루는 이 세계의 원리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들은 곧 교육의 문제이다. 이들은 사실의 세계에 속하는 인지나 통찰의 대상이며, 또한 진리의 세계에 속하는 성찰과 자각의 대상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명구를 자기 교육의 표어로 삼았다. 불가에서는 자신을 알라(知)는 차원을 넘어 깨달으라(覺, 見性)고 한다. 깨달음이 있은 후에는 깨달았다는 단계도 초월해야 한다. 깨달았다는 것을 아는 상태는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의 차이를 의식하는 단계이고, 그것은 일종의 집착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 타인의 세계와 인생을 배우는데 절대적인 방법이란 없다. 인지나 통찰, 자각 각성 등의 어떠한 계기로서도 교육현상은 일어날 수 있다. 경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에 얽매인 피동적인 삶이다. 인간의 자율성이 규제받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삶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외부로부터 첨가되는 삶, 인위적이고 조작적인 삶이다.

오늘의 대중사회는 전체주의로 무장되어 있다. 대중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개인은 개성을 버리고 대중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대중이 되어야 한다. 만약 청소년기를 대중에 매몰되어 보낸다면 그들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에 자신을 맞추고 살아가게 된다.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18세 청소년 56만명이 투표권을 가진다. 교육현장의 혼란을 막아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다. 교실의 정치 중립성 확보 방안은 매우 중요하다. 청소년기의 삶의 영역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정확히 인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양한 개성을 지닌 인간들을 포용하는 사회가 선진사회다. 청소년들이 획일성을 강요받고 교육받고 지향하는 우리사회에 희망이 없다. 청소년들의 영혼을 좀먹게 하는 획일적인 교육이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어떠한 편견을 가지지 않는 교육, 참다운 깨우침과 참다운 자기의 삶을 사는 교육이어야 한다.

예수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한다. 임제선사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 했다. 어디를 가든지 스스로 주인이 되고, 서 있는 그 곳이 모두 진리의 세계이다. 그래서 구상 시인이 ‘너의 앉은 그 자리가 꽃자리’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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