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수요단상] 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온 세상을 닭장쯤으로 여기고 닭장에 든 살쾡이처럼 이 사람 저 사람을 닥치는 대로 살해한 살인범이 제 목을 맬 오랏줄이 걸려있는 사형대 앞에서 마지막 말을 이렇게 남긴 일이 있었다. 나는 어서 죽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빛을 볼 줄 몰랐던 내 눈을 기증하여 선한 사람의 눈이 되게 하고 싶다. 그리고 그 살인범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악(惡)을 범했던 사람이 선(善)을 알아차리면 눈물을 흘리게 된다. 맨눈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없다. 눈물로 두 눈을 적시며 매달렸던 마음속을 적신다. 이러한 순간은 아무리 살인마의 마지막일지라도 숙연하고 엄숙하다. 왜냐하면 세상 탓으로 인간이 악해질 수도 있고 선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 탓이라고 해서 악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용서받을 수가 없다.

눈을 기증하고 마지막 눈물을 흘렸던 그 살인마는 제 몸을 조심히 간직하는 효를 몰랐던 때문이다. 제 몸 아까운 줄을 몰랐던 탓으로 남을 해치고 남을 죽이는 짓을 저질렀던 셈이다. 된 사람이라면 남의 몸을 아껴줄 줄을 알아야 한다. 이를 몰라 살인범이 나오는 것이다.

왜 살인범은 빛을 보지 못했던 자신의 눈을 뽑아 빛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 기증해 달라고 애걸을 했을까? 증자는 예절이 바른 눈은 신뢰를 얻는다고 말했다. 살인범이 뜻했을 빛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 빛은 선(善)이라 해도 될 것이며 예절이라 해도 되고 신뢰라 해도 될 것이다. 만일 사람을 믿거나 도와줄 마음이 있는 인간은 살인을 범하지 않는다. 살인을 저질러 버린 것을 살인범은 마지막 죽어가야 할 순간에 어둠이라고 말했던 셈이다.

살인범이 다 죽음의 순간에 선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막가면서도 울부짖고 갖은 꾀를 부리며 사형의 순간을 피해 보려고 악을 쓰면서 억지를 부리고 난폭한 발언을 서슴지 않으며 끝까지 세상을 저주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가는 살인범들도 있다. 죽음의 순간까지 막가는 인간들은 동정의 여지마저도 없다. 그러나 어둠만 보았던 자신의 눈을 빛을 보게 해달라고 마지막 간청을 남기고 간 살인범에겐 죄를 미워하지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빛을 보게 해달라는 한마디의 말로 살인을 범하여 천했던 과거를 속죄하는 극악한 살인범의 마지막 말은 새도 죽으려 할 때는 애처롭게 울고 사람이 죽으려 할 때는 그 말이 착하다. 그래서 평생 악한 짓으로 못된 사람도 죽을 때는 착해 진다고 하는 것이다. 평소에 못된 사람이 마음이 변하여 착해지면 죽을 때가 됐나보다 라고 하는 것이다.

군자가 소중히 여겨야 할 도에는 세 가지가 있는 법인데 그 하나는 몸을 예에 맞게 움직이면 난폭한 짓을 멀리하게 되고 그 둘은 눈빛을 예에 맞추면 신의(信義)를 가까이 할 수가 있고 그 셋은 말을 예에 맞게 하면 천한 억지를 멀리할 수가 있다고 한다. 우리 모두 새겨둘 귀한 가르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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