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순 수필가

 

[기고] 임정순 수필가

거실 벽면에 대형 달력을 걸어 놓고는 오랫동안 서성거렸다. 자꾸만 웃음소리가 들리는 환청 때문이다. 가만가만 귀 기울어보니 동생들이 자기 생일날에 동그라미를 하겠다고 난리다. 아버지는 그날도 또 다른 달력을 가지고 오셔서 한쪽 벽에 걸어 놓기도 전에 한바탕 쟁탈중인 소란스러움이 타임머신을 타고 나타났다.

당대에 달력들은 인기 있는 영화배우들의 수영복 입은 사진이나 주로 한복 입은 모습을 무슨 명화라도 되는 양 가장 눈길 좋은 명당자리를 차지했다. 어쩌다 풍경그림 달력은 새 학기에 교과서 겉표지를 싸는 포장용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반들반들해서 학기가 끝날 때 까지도 그대로여서 달력을 귀하게 대접했고 또 다른 재미는 매일매일 한 장씩 서로 떼어내겠다는 일력은 요즈음 보기가 힘들다.

지금이야 그림이 있는 작은 글씨보다는 큰 글씨와 메모할 여백이 있는 달력하나면 족하다. 방마다 탁상용도 있고 핸드폰만 열면 날짜와 시간이 저절로 나타난다. 심지어는 핸드폰 속에 있는 달력에다 일정표를 적어 놓으면 알아서 알려주고 별도로 메모하라는 공간도 있다. 점자달력을 제작하여 시각 장애인들에 희망을 기증하는 기업도 있고 가족사진이나 애기들 성장과정을 달력으로 만들어 가족끼리 기념으로 나눠 갖기도 한다.

매년 마지막 달력을 떼어내고 새 달력을 걸면서 참 멀리도 왔다는 생각이 미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믿기지 않는 나이 숫자다. 누가 나를 이끌고 누가 뒤에서 밀었기에 떠밀려 가는 건가. 벽에 걸려 있는 시계는 저 할 일만 하고, 달력은 아무 말 없이 일 년 내내 그 자리에 있건만 어제는 분명 과거요 내일은 다가 올 미래다. 오늘은 누구나 영원하기를 바랄 뿐이다.

매일 매 순간이 다 똑같지 않은 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 거슬러 다시 돌아 갈 수 없듯이 우리네 인생도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다 왕복표가 아닌 일방 통행권으로 각자 주어진 삶을 역사의 한 단면위에서 살다 가야 하는 자연의 이치다.

희로애락을 다 겪어내고 60고개를 훌쩍 넘은 이 나이는 더 이상 종종거리며 욕심을 내는 아마추어의 삶은 아니다. 느릿느릿 느림표도 있어야하고 잠시 쉬어가는 쉼표도 필요하고 내 영혼도 잘 따라오는지 뒤도 돌아보는 여유로움이 있어야 주변 사람들도 힘들지 않을 것이다. 오롯이 주어진 시간을 지금껏 살아온 지혜로움으로 녹여내며 뜻하지 않게 찾아오는 병마와 싸우는 사람들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는 약손이 되고 싶다.

“그래, 그럴 수 있지. 괜찮아~” 이 말이야말로 어린아이부터 노인네까지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지 무한정 남발해도 좋을 듯싶다.

달력 앞에서 겸허해지는 마음은 지나간 것은 지나간 거고 새해를 맞이하는 다짐이고 내 분수에 어긋나지 않게 살겠노라 무언의 약속을 하는 거다.

첫 장을 넘겨보니 찬란한 태양이 지평선위에서 시작을 알린다. 그림만 봐도 가슴 벅차게 좋은 기운과 희망이 절로 생긴다. 또 한 장 한 장 넘겨보니 달마다 아름다운 계절의 변화가 보이고 달마다 가족들의 생일날이 보인다. 다시 천천히 넘겨보니 잊지 말아야 할 부모님들의 기일 날에 먼저 동그라미를 그리고 미역국을 끓여 드릴 수 없는 부모님들의 생일날에는 차마 동그라미를 그릴 수 없어 마음속에 담아둔다.

어느새 일 년 365일중 온통 내 마음을 차지한 손자의 생일이 가장 특별한 날인지라 동그라미 두 개를 그리고 그 다음은 5월에 만나는 딸의 출산일이다. 하지만 무수한 날 중 특별한 날보다 소소하고 평범한 날들이 많은 것이 더 좋은 것은 순리대로 사는 것이 최고라고 연륜이 말해 준다.

어둠이 살며시 거실에 들어 온 해질 무렵 온가족의 무탈을 기원하셨던 아버지 마음도 지금 내 마음일까? 달력을 걸면서 멋쟁이셨든 아버지가 몹시 보고싶어 눈물이 난다. 새해에는 어떤 사연들로 365일을 채우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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