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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로 세우려 하는 정의의 투쟁인가?심의보 충북교육학회장·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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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2.17  15: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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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의 창] 심의보 충북교육학회장·교육학 박사

역사는 거울과 같다. 광화문과 서초동을 보면서,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을 보면서 지도자의 덕목을 생각한다. 훌륭한 지도자는 번영과 쇠퇴의 근원을 밝히고 성공과 실패의 조짐을 꿰뚫는다. 혼란함의 낌새를 살펴서 나아가고 물러남의 시기를 조절하고 현명한 인재를 가까이하며 아첨꾼을 멀리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중요한 기준은 충신과 간신배를 식별하는 일이다. 국가의 흥망과 백성의 화복이 이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나라의 기강을 세우고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 도끼를 메고, 멍석을 짊어지고, 죽음을 각오하고 상소를 올렸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려고 궁궐 앞에 이마를 찧어가며 임금을 꾸짖었고, 백성의 재물을 수탈하는 탐관오리들을 내쫓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간언했다. 그야말로 “도끼로 맞더라도 바로 간하며, 가마솥에 삶아도 옳은 말을 다하는 충신(迎斧鉞而正諫 據鼎鑊而盡言 此謂忠臣也, 抱朴子)”이었다.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했던 선비들은 임금에 대한 한 치의 불의도 용서하지 않았으며, 조금의 비리와 방심도 묵과하지 않았다. 사육신(死六臣)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와 측근들을 제거하려 했지만 김질의 내부 밀고로 실패했다. 그들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과 함께, 불륜의 임금을 제거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아 역사를 바로 세우려 했던 것이다.

세조가 친히 신문에 참여해 협박과 회유를 했지만 성삼문은 “상왕이 계시는데 ‘나으리’가 어떻게 나를 신하로 삼을 수 있는가?”라며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어 박팽년을 국문하지만 그도 흐트러짐 없이 당당히 단종복위 모의를 시인한다. 그리고 역시 세조를 “나으리”로 호칭한다. 달군 쇠로 사육신의 다리를 태우고 팔을 잘라내게 했으나 그들의 안색은 변하지 않고 오히려 세조를 나무란다.

지도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태도와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리기 때문이다.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은 이미 공유한 태도를 더 강화시킨다. 바보는 더 바보가 되고 영리한 사람은 더 영리해진다. 그들은 집단토의를 통해 초기의 생각을 더 강하게 만든다. 모험을 추구하는 지도자는 더 모험적이 되고 고집쟁이는 더 고집스러워진다.

이처럼 지도자 주변의 집단이 반대 의견으로부터 격리될 때 집단 사고는 잘못된 결정을 내린다. 월남전 당시 미국의 존슨 대통령과 정책자문기구인 '화요 오찬 집단’은 정보 전문가와 동맹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월맹과의 유리한 협상을 위한다며 확전을 계속했다. 공중 폭격, 고엽제 살포 등 섬멸작전의 결과 미국인 5만8000명과 월남인 100만 명이 사망했고 국론은 양분되고 엄청난 국가 재정을 낭비했다.

월남전과 단종의 복위를 위한 변란 모두 너무나 참혹했다. 국가발전에도 많은 악영향을 끼쳤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존슨 대통령이 전쟁반대 의견을 경청했더라면, 세조가 주나라 주공(周公)이 조카 성왕을 도와 왕업을 계승한 것처럼 학살된 여러 선비들과 합심해 단종을 보필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는 다양한 사람의 정보가 결합될 때 더 현명해질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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