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사색] 정우천 입시학원장 

학부모들의 걱정과 교육 당국의 권고로 임시 휴원하고 답답한 마음에 영화 한 편 보러 극장을 갔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바이러스에 모든 일상이 마비된 것 같다. 휑한 거리를 마스크 쓴 몇 사람들이 웅크리고 좀비처럼 걸어 다닌다. 극장 매표소 앞의 로비는 텅 비었다. 마치 페스트가 창궐한 중세 유럽의 어느 도시 같다. 바이러스에 대한 직접적인 공포는 육체를 위축시키고, 전파를 타고 퍼지는 전염병에 대한 뉴스는 정신을 위축시킨다.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끝까지 경쟁했던 샘 멘데스 감독의 영화 ‘1917’을 보았다. 한 번에 촬영한 듯 보이게 하는 기법인 원 컨티뉴어스 숏(One continuous shot)으로 몰입감을 높였다는 영화는 명불허전, 전쟁터를 직접 체험하고 온 듯한 느낌을 준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가장 치열하던 유럽 서부 전전이 배경인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통신이 두절된 최전방에 공격 취소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떠난 스코필드와 브레이크라는 두 병사의 이야기이다.

공격을 취소하지 않으면 함정을 파놓고 퇴각한 독일군에 연합군 부대 1,600명은 몰살당하게 된다. 결국, 두 병사는 싸움터의 한가운데를 관통해 전령의 임무를 수행한다. 샘 멘데스 감독의 할아버지가 전해준 전쟁 중 겪었던 이야기를 비주얼로 재현해 만든 영화다. 정통의 역사가 아닌, 구전으로 전해진(Oral history) 개인의 추억이 담긴 이야기는 그래서 더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다.

1차대전은 아날로그적 전투인 참호전이 주류를 이룬다. 그래서 그 전쟁의 특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 근처인 서부전선에서 그려지는 참혹한 전쟁의 모습은 현실적이고 가혹하다. 그들이 통과해 지나쳐야만 하는 곳은 서로 대치해 벌인 치열한 전투로, 살아있는 인간을 남기지 않았다 해서 이름 붙여진 노맨스 랜드이다. 발음이 낭만적으로 들려 착각할 수 있는 로맨스 랜드(Romance Land)가 아닌 노 맨스 랜드(No Mans Land)이다. 목표 지향적이고 용감한 블레이크는 현실에 발목을 잡히고, 현실적이고 냉정한 스코필드는 결국 목표에 도달한다. 목적지의 지친 병사들 위로 들리는 ‘초라한 영혼의 방랑자’(I Am a Poor Wayfaring Stranger)라는 쓸쓸한 노래는 허망함의 끝이다. 현실에서 표현된 지옥을 지나는 여정, 그 극한의 경험을 주인공과 함께 한듯한 기억은 텅 빈 객석에 불이 들어온 후에도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외교가 실패하면 전쟁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전쟁의 진창 속으로 사라진 무명의 죽음 위에 역사가 쓰인다. 그리고 그 역사는 어떤 영웅의 후일담으로, 혹은 어떤 이념의 광채로 포장되어 후세에 전해진다. 타협이 사라진 곳에 전쟁이 일어나듯, 정치가 실패한 사회는 종교를 부른다. 세월호의 슬픈 기억 뒤에 구원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던 기억이 있는데, 기승을 떠는 바이러스의 암울한 공포 뒤에 신천지라는 종교단체의 그림자가 기웃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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