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용 언론인(대전일보 전 대표이사·발행인)

 

[신수용의 쓴소리칼럼] 신수용 언론인(대전일보 전 대표이사·발행인)

고려 때 ‘서희(徐熙)’라는 외교가가 있었다. 그 분은 껄끄러운 송나라에 단신으로 가서 중단된 국교를 트고 귀국했다.

얼마 뒤 거란(契丹)이 쳐들어왔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왕을 비롯 조정 대신들이 항복을 하자는 안과 서경(西京) 북쪽을 내주고, 강화하자는 친화파의 주장이 맞섰다.

서희는 모두 반대했다. 그리고 자진해서 왕이 써준 국서를 가지고 적장 소손녕과 담판을 지었다. 소손령이 옛 고구려 땅은 거란 소유라고 우겨댔다. 서희는 적장의 주장에 반박, 국명으로 보아도 고려는 고구려의 후신임을 설득했다.

결국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온 소손령은 그분의 지략에 무릎을 꿇고 회군했다. 이후 여진을 몰아내고 지금의 평북 일대의 국토를 완전히 회복시켰다.

일제에 나라가 벗어났을 때 ‘서희’라는 별명을 가진 분이 있었다. 바로 장면(張勉)박사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정부수립과 함께, 그를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했다. 그리고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붓으로 세로로 쓴 신임장을 보냈다. 신임장에는 이 대통령과 임병직 초대 외무부 장관의 인장으로 그의 신분을 보장했다. 장 박사는 대한민국 제1호 대사가 되어 이 신임장을 품고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국권을 회복했지만 힘이 없는 대한민국은 유엔을 두드렸다. 임 외교부장관의 노력 끝에 1948년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에서 외교사에서 값진 결과를 얻었다. 유엔은 당시 ‘대한민국만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자유 진영 국가들이 우리 정부를 잇달아 승인했고 정부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무엇보다 1949년 1월 1일 미국이 가장 먼저 우리 정부를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그러자 이 대통령은 유엔 파견 수석 대표였던 장면 박사를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했다. 미국도 주한 미국 특사로 와 있던 존 무초 대표를 초대 주한 미국대사로 임명했다.

장 박사가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된 것은, 48년 9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3차 유엔총회 대한민국 대표단을 맡아서다.

장 박사는 3개월에 걸친 외교활동은 전쟁이었다고 훗날 술회한 일화는 유명하다. 힘없고, 무지하고, 가난한 나라의 외교가 장면은 당시 쿠바도 만나주지 않을 때였기에 설움은 말할 수 없이 컸다고 회고록에 담았다.

한 언론인은 연전에 장 박사가 유엔총회 수석대표 때 받은 여비를 아껴 3000달러짜리 자동차를 구입해, 트루먼 대통령 취임식에 특사로 참석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차를 잡느라 애를 쓰다 보니 한 나라의 대사가 쪼르르 비를 맞았다. 그때의 비애감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

전쟁에 가까운 외교활동을 통해 그해 12월 한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받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장 박사를 주미대사로 임명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우리 기억 속에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기억되는 장면 박사의 외교관으로서의 활약도 본격화됐다.

장 박사의 빛난 외교력은 6.25 한국동란 때도 나왔다. 전쟁이 난 날 그는 1950년 6월 2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이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받았다.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나라가 함께 이를 물리치자. 한국을 도와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이어 트루먼 대통령과 미국 국회의원들을 만나 미국의 파병을 요청했다.m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유엔 안보리에선 유엔군 파병 결정이란 성과를 냈다. 한 언론인은 ‘신생 국가 주미대사에겐 본국의 빈약한 지원을 불평할 시간이 없었다. 새로운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애국심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고 적었다.

우리는 장 박사를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기억하지만 임병직 초대외교부장관과 장면 박사의 눈물이 있었기 지금 국제무대에 설수 있었다. 그래서 반기문도 나왔고, 일정부분 유엔의 분담금도 낼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쌓은 외교력이 지금 시험대에 올랐다. 코로나19라는 괴상망측한 전염병으로 우리국민의 입국을 막는 나라가 100여 개국에 이른다. 우리나라의 수교국의 절반이 한국인의 입국을 막고 있다.

우리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터키등과 함께 우방국으로 치던 호주와 뉴질랜드가 한국인 입국을 막더니 이젠 가깝고도 먼 일본마저 한국인 입국자를 막는다니 기가 막힌다.

일본은 한국과 중국에서 입국하는 이를 전원 2주간 격리한 뒤 입국허가를 내주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입국을 사실상 전면 거부한다는 얘기다.

자국민을 보호하겠다는 일본 아베정부의 입장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한국인 보이콧이라는 사실에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낸다. 초라한 나라꼴도 우습지만, 우리에게 적잖은 타격이 우려되는 현실이다.

코앞에 닥친 도쿄올림픽을 예정대로 치르려고 안간힘을 쓰는 일본이 자구책이라고 보기에는 아쉬움이 크다. 그 나라 역시 코로나 19의 초기 방역에 실패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나 호주등도 14일 내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입국을 일주일간 금지하고 이후 갱신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중국 어느 마을에서는 한국에서 돌아온 한국교민부부가 집에 들어가자, 각목으로 ‘×자’를 쳐 못질까지 했다는 사진을 보고 서글펐다. 아니 우리의 힘없는 외교력에 한심했다.

어찌해서 선배들이 피눈물 흘리며 쌓은 우리 외교가 전염병에 무너졌는지 개탄스럽다. 기껏 해당국가 주한외교담당자를 불러다 유감 표명으로 그치는 게 우리의 외교력인가.

나라의 외교부 장관이 유럽을 방문했지만 해당국가 외교부장관이 만나주지 않고 문전박대를 했다.

이스라엘과 모리셔스 등은 우리에게 사전 예고도 없이 한국인 입국을 금지해 우리 국민들이 현지 공항에서 사실상 감금당하는 일도 있었다.

박항서 축구감독의 덕분에 양국의 친밀감이 쌓이는 듯싶던 베트남조차 우리 아시아나 항공기의 이륙도 불허했다. 눈물을 머금고 인천공항으로 회항해야하는 일이 벌어졌다. 다름 아닌 무참히 깨져 가는 우리의 외교수준과 역량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베트남은 한국인의 입국금지조치를 취하자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베트남 부총리에게 전화로 강하게 유감을 전했다. 베트남은 그러나 다음 날 한국발 항공기 착륙을 막았다.

이게 세계평화와 안전보장, 인권과 환경보호를 앞세운 유엔의 사무총장까지 배출한 나라의 외교력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국민소득 1인당 3만 달러의 선진국의 문 앞에 왔다고 자랑하는 나라이며, 이게 10대 세계 수출국이라며 대통령까지 나서 극찬하는 나라의 위상인지 실망스럽다.

세계 각국의 한국인 입국 금지가 줄을 잇자 강경화 외교장관은 뭐라했을까. 그는 "방역 능력이 없는 국가의 투박한 조치"라고 했다.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꼽는 여러 나라들이 한국인 입국 금지조치도 방역능력이 없는 국가의 투박한 조치‘라고 봐야하느냔 말이다.

문제는 코로나 19를 위기단계 중 심각수준으로 최고로 격상했다. 애초 우리 정부의 외교채널을 모두 가동, 각 국의 사전에 과잉조치를 막을 수 있었다. 이를 소홀히 했기에, 전염병 국가라는 오명 외에도 우리의 수교국의 절반 넘게 입국을 차단해 버린 것이다.

연초만 하더라도 우리는 사전 비자없이 189국에 갈수 있었다. 그간에 쌓아놓은 외교의 힘이자,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었다.

한데, 지금은 마음대로 외국도 갈수 없는 딱한 국민이 되었다. 세계인들이 우리의 발길을 기피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와 가깝다는 미국 역시 코로나19 사망자 10여명이 나왔다. 곳곳에서 차이나 타운 내지 코리아 태운에 대한 비난과 욕설이 잇달고 있다한다.

대선중인 트럼프역시 미국 사람의 여론에 민감하다. 그는“한국 등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 적절한 때 (여행 차단 조치를)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때문에 미국마저 우리의 입국을 제한한다면 적잖은 타격이 예상된다. 미국과의 경제문제, 안보문제, 외교문제등 적잖은 분야에서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1953년 10월 체결한 한미상호보호조약만 내세울게 아니다. 이해타산적인 것이 강대국이며, 자국민보호에는 남다른 미국이기에 언제 어떻게 변할 줄 모른다. 그래서 외교가 중요한 것이다. 코너에 몰린 ‘강경화 외교’, 서희나 장면같은 노련한 외교가 더욱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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