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순 전 복대초 교장 ·시인

[박별칼럼] 박종순 전 복대초 교장 ·시인

멀리 대관령이 가까워오니 하얀 날개를 단 풍차들이 한가로운 몸짓을 선보인다. 2년 전 꿈처럼 펼쳐지던 평창동계올림픽이 파노라마처럼 되살아나며 해발 700이상 높은 산들이 청년의 기개로 솟아있다. 산 정상부근에는 하얀 눈이 그대로 있어 이국적인 풍취를 자아낸다. 청주에서 3시간 가까이 달려 강릉에 도착하였다. 오늘 긴급 나들이 목적은 ‘율곡매’라 불리는 천연기념물 매화나무를 알현하기 위함이다. 우리나라에는 문화재청에서 고매화 다섯 그루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놓았는데, 그 중 첫째가 수령 600년으로 추정하는 신사임당과 율곡선생이 직접 가꾸었다고 하는 율곡매이다. 그런데 얼마 전 율곡매 큰 두 가지가 고사 직전에 이르러 잎이 나오다 멈추었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안타까움과 직접 가보고 따듯한 기라도 불어넣어주고 싶다는 데 뜻을 모았다.

누구보다도 건강히 태어나 첫돌을 지낸 손녀딸을 동행의 일원으로 다섯 가족이 총출동 오죽헌을 찾은 것이다. 3월이면 긴 겨울 이기고 매화꽃이 필 즈음인데 과연 꽃이 피어있을까? 기대와 걱정을 안고 서둘러 차에서 내려 오죽헌 입구로 향하였다. 안내도를 살펴보니 ‘오죽헌에는 나이 많은 세 가지가 있는데 보물 제 165호 오죽헌, 천연기념물 제484호 율곡매, 강릉시화 배롱나무가 그것이다’라는 문구가 크게 시선에 들어온다. 다급한 내 마음을 아는지 손녀가 앞서 아장걸음을 힘차게 걸으며 환히 웃음을 짓는 것이 아닌가! 너무 예쁘고 대견하여 마치 매화 한송이를 보는 듯 위안이 된다.

큰 대문 자경문을 넘으니 잘 정리된 넓은 공간이 옆으로는 소나무 언덕에 둘러싸여 사임당 품처럼 우아하게 기다리고 있다. 도대체 율곡매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오죽헌을 향해 계단을 올라간다. 수학여행 등 여러 번 방문했지만 기억이 아련하다. 나보다 고매화의 멋에 빠져 앞서가던 남편이 ‘여기 있다’라고 손짓을 보낸다. 오죽헌 집 뒤뜰에 지킴이처럼 서있는 나무이다. 아! 율곡매 첫 만남이 검은 빛으로 아무 말이 없다. 기사에서 본 대로 담장 밖으로 향하는 한 가지에만 꽃이 피었고 말라가는 두 가지는 검은 비닐망으로 아래를 감싸 놓았다. 가지는 마른 채 버섯이 곳곳에 피어 있을 뿐 꽃 한송이 매달고 있지 않다. 600년을 살아오면서 모진 비바람과 사람들의 큰 소리를 듣느라 힘들었겠지, 어린 손녀와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나무여! 어서 다시 생기를 얻고 향기로운 매화꽃을 피워주셔요”

율곡이 태어난 몽룡실을 들여다보니 매화의 특유한 향이 감도는 듯하다. 아들과 함께 키우던 매화가 저리 아프니 사임당의 마음도 편치는 않으리라. 내 발걸음도 쉬이 돌아서지 않는다. 자경문을 넘어 나오자 율곡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온 가족이 다가가 머리 숙이며 지혜를 구해본다. 동상 아래 ‘見利思義’라고 한자로 새겨져 있다. 논어 헌문편에 나오는 견리사의·견위수명이라는 말이다. 이익을 보거든 정당한지 살피고 국가가 위태로우면 목숨까지 바친다는. 코로나 19가 쉽게 가라앉지 않고 마스크 문제가 심각한데 지금은 개인의 이익을 구할 때는 아닌 것 같다. 너도 나도 한 마음으로 난국을 헤쳐 나가고, 율곡매 두 가지도 다시 생기를 얻기를 소원한다. 희망을 늦출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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