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4장 소슬바람으로 바느질을 하며

▲ <삽화=류상영>

"집안에 어른이 안 계신다는 말은 아뉴. 하지만 집안의 대들보가 되어야 할 그 이가 집안에서 기거를 안하고 밖으로만 맴 돌믄 문제가 있다고 봐유. 남의 이목을 떠나서 당장 승철이가 멀 보고 배우겄슈. 그랑께 어머님이 잘 타일러서 그 이를 모산으로 불러 들였으믄 좋겄구만유. 무슨 말인가 하믄……"
옥천댁의 기대와 다르게 들례는 학산을 떠나지 않았다. 옥천댁은 생각다 못해 보은댁에게 사정을 했다.
"워틱하겄냐? 모산에서 면사무소로 출근하기 보담은 우신 학산이 가찹고 항께 늦게 끝나는 날이믄 한번씩 그 집에 가서 잘 수도 있을 수 벢에. 그라고 동하 말대로 들례를 아무리 씨받이로 읃었다고는 하지만 사람의 정이라는 거시 칼로 무시를 짜르듯 토막 낼 수도 읎는 벱 아니겄냐. 그라고 너도 대충은 들어서 알고 있는지 모르겄지만 들례 갸 승질이 보통이 넘는다. 갸는 신기神氣가 있어서 눈깔이 뒤집히믄 안 뒤 안 가리는 아여. 동하가 공무원인데, 괜히 미친개한테 물려서 좋을 것으 읎잖여."
옥천댁은 더 이상 기대할 벽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이동하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운명에게 맡기기로 하고 들례에 대한 건은 말문을 닫았다.

이동하는 면소재지에 있는 전기회사 검침원이 한 달에 한번 씩 전기 검침을 오듯 늦은 저녁에 삐죽이 찾아 들었다가 아침이슬을 밟으며 사라졌다.

"내가 인물이 모자라, 아니믄 재산이 읎어. 이래봬도 영동군 부면장 모임에 나가기만 하믄 이 담 군수 선거 때 꼭 출마하라고 성화를 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녀. 내가 꼭 그런 사람들 말을 믿는 거는 아니지만, 솔직한 이야기루다 영동군 관내에 있는 부면장들만 꽉 잡고 있어도 군수 자리는 내꺼나 마찬가지여. 선거운동을 하기에는 부면장이 면장보다 부담감이 없기 때문이지. 왜 그른 줄 알아? 면장은 퇴직하믄 그만이지만 부면장은 면장이 될 확률이많다는 거지. 한마디로 빽이 통하는 사회에서는 빽을 잘 이용해서 성공할 수 있는 벱이거든. 그릏게 알고 승철이나 잘 키워. 그기 당신이 날 내조하는 일잉께."

이동하는 옥천댁의 얼굴이 굳어있든 말든 떠벌리고 싶은 대로 떠벌리고 나서 휑하니 나가 버리기 일쑤였다.

옥천댁은 이동하가 집을 다녀간 이튿날 밤이면 다른 날과 다르게 뒤안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몇날 며칠이고 바람 소리에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는 학산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이동하를 붙잡고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 와 달라고 애원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상대가 들례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나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근본이 있는 여자도 아니고 근본은 물론이고 태생도 정확히 알 수 없는 들례다. 그런 여자를 상대로 이동하의 바지자락을 붙잡기에는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옥천댁은 배냇저고리를 만들다 말고 들창문을 바라본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의 들창문은 낯설다. 통증에 시달려 오던 사람이 통증이 없을 때가 오히려 불안한 것처럼 들창문이 낯설게 보일 때는 시간이 영원히 정지해 버린 것 같은 환각에 접어든다.

그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원망 할 필요가 읎어. 내가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 것츠름 그 사람들도 날 원망 할 자격은 읎는 거여. 사람은 어채피 혼자 살아가야 하는 겅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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