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수요단상]  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20세기 후반 미국의 한 자동차 회사에서 날렵한 모양의 소형차를 출시했다. 이 차는 아담한 외형과 나름 준수한 성능으로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한 번은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이 차를 타고 가다가 뒤에서 오던 트럭과 충돌을 했는데 큰 충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차에 불이 붙어서 어머니는 사망하고 아들은 큰 부상을 입는 사건이 있었다.

이에 유족들이 자동차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고 그 과정에서 참으로 경악할 만한 사실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 회사는 이미 자신들이 생산한 자동차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결함을 해결하는데 드는 비용과 이 결함으로 인해 발생할 사고를 처리하는 비용을 비교해 보았더니 사고 처리 비용이 훨씬 더 적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에 회사는 자동차를 리콜하여 수리하는 대신에 차량의 결함으로 사고가 나면 이를 변상해 주는 쪽으로 방침을 정하게 된다. 이에 미국 법정은 이 회사에 대한 막대한 벌금을 선고하고 미국 국민들은 인명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기업의 형태에 아주 큰 충격을 받았다.

우리 모두는 생명 그 무엇보다 귀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은 이와 같은 고백을 실제로 얼마나 체감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때로 머리로는 생명의 가치가 참으로 귀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행동으로는 그 가치의 값이 얼마인지를 비교하며 계산한다. 그래서 마음으로 외치는 소리와 우리의 손과 발이 행하는 행동이 다른 모습을 보인다.

성경을 보면 예수는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묻는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눅 15:4)

이 말을 들은 어떤 이는 이렇게 되물을 수 있다. “양 아흔아홉 마리와 한 마리를 비교해 보면 당연히 아흔아홉 마리의 가치가 더 큰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방금 ‘생명’은 그 무엇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고 동의하지 않았는가? 그 어떤 것이란 아무 비교할 것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설사 그 비교 대상이 다른 생명의 가치라고 해도 말이다.

물건은 때로 개수에 따라 혹은 그 쓰임에 따라 가치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생명은 그럴 수 없다. 하나의 생명과 다수의 생명을 비교하여 더 많은 생명의 개수가 더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순간 우리는 오히려 생명의 가치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과를 맛보게 될 것이다.

예수의 물음은 단순히 길을 잃은 양 한 마리의 특별함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이 말은 아흔아홉이라는 생명의 숫자에 얽매이지 않고 단 하나의 생명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참된 목자라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지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단 한 마리의 잃은 양까지도 위험을 무릎 쓰고서라도 찾으려 할 것이다.

참된 생명의 가치를 아는 자라면 생명의 숫자에 집중하지 않고 생명 그 자체가 가진 참된 가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코로나 사태 동안 우리가 집중한 것은 무엇인가? 생명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보이지 않게 힘쓰고 애쓰는 사람들의 손길이었는가? 아니면 생명을 여러 가치 의미의 숫자로 표현하며 자극을 남발한 표현들인가?

생명의 가치는 그 숫자나 용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은 그 자체로 가치와 의미를 완전하게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의미가 숫자가 아닌 존재만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는 가치, 그것이 바로 진정한 생명의 가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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