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수요단상] 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인류는 근래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올 초 중국과 아시아를 시작으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새해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는 이 시기에도 코로나 사태의 종식은 아직 오지 않았다.

지난 2015년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온라인 지식 컨퍼런스 테드(TED)에서 강연을 하면서 ‘바이러스 대유행’에 대해 경고했다. 그는 이 강연에서 “앞으로 수십년 내에 1000만명 이상을 죽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전쟁보다는 높은 전염성을 가진 바이러스 질병일 확률이 매우 높다”고 예측했다.

그의 말대로 지금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전쟁이 아닌 질병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집회가 금지되고 학교가 문을 닫았다. 각 나라의 정부는 질병 퇴치는 물론 얼어붙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붓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코로나의 역설’과 같은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들이 눈에 띈다. 인간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육체가 병들고 경제가 무너지고 있는데, 오히려 자연은 인간 활동의 둔화로 인해서 대기 오염이 줄어들고 동식물들이 빠르게 번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류의 위기가 자연에게는 생존의 기회가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몇몇 사람들이 이를 ‘역설’이라고 부른 것이다. 예수는 처음부터 이와 같은 역설과 아주 친밀했다. 자신이 사랑해야할 이웃이 누구냐는 한 율법교사의 질문에 예수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혐오하고 멸시했던 사마리아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 한 편을 들려준다.

또한 하나님께 칭찬받는 사람은 다름 아닌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는 예수의 선언은 그가 가진 ‘역설’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예수는 이미 ‘역설’이 가진 힘과 그 매력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리의 인생이 늘 이 ‘역설’의 개념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톰 필립스가 쓴 ‘인간의 흑역사’를 보면 인류가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질렀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인류는 이와 같은 실수를 매번 반복할 뿐만 아니라 그 이유도 실은 지난 시절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노력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그럼 왜 인류는 이처럼 어처구니가 없는 일들을 반복하여 저지르는가? ‘역설’의 개념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듯 정해진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때로는 우리의 실수와 잘못이 인류를 위한 큰 유익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또 때로는 오늘날과 같은 위기가 인류 역사의 큰 발전을 위한 기회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상황은 예측이 어려워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바라보며 계획할 때, 이런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역설적 결과가 나올까 두려워서 어떻게 해서든 인간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습성이 또한 하나의 역설이 되어서, 더 잘하기 위해 쏟아 붙는 노력의 결과가 오히려 ‘인간의 흑역사’로 기록될만한 대실패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자신의 미래를 향한 명확한 뜻과 계획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실천함에 있어서는 내 자신이 의도하지 않는 결과에 대해서도 유연한 입장을 보일 수 있을 만큼 대담하고 여유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특히나 지금과 같이 사회, 경제, 정치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눈에 보이는 희망을 발견할 수 없을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역설’은 참으로 우리를 당황스럽게도 하지만 동시에 절망과 같은 상황을 견딜 수 있게 하는 힘도 된다. 지금의 상황은 모든 면에서 참으로 절망적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이전에는 기대할 수 없었던 새로운 소망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상황을 견디기 위해 ‘역설의 기대’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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