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수필가

[백목련] 이향숙 수필가

세차다. 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한껏 치장했던 머리카락이 나부낀다. 온 몸에 올랐던 물기를 모아 발등으로 쏟아 내었다. 송이송이 핏빛 영산홍이 피어난다. 질투에 눈먼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한 뼘씩 성숙해지는 봄이다. 이런 날은 뜨끈한 국물이 생각난다. 호호 불며 숟가락으로 떠먹다가 아예 그릇 채 마시던 콩나물국의 담백함이다.

윗목에 떡하니 자리를 잡은 시루를 덮은 무명 보자기를 걷으면 콩나물이 노랗게 올라와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물만 주는데 어찌 그리도 잘 자라는지 겨우내 밥상에 오르더니 봄기운에 나물이 지천이어도 한자리를 차지한다. 바깥주인이 막걸리를 드신 다음날은 북어대가리를 푹 삶아 육수를 낸 국물로 커다란 대접이 온천이라도 되는 줄 알고 몸을 담그고 있었다. 양지 바른 곳에 달래가 머리를 내밀면 안주인은 함지박 가득히 콩나물을 뽑아 몇 차례 헹구어 낸다.

가마솥에 밥을 안칠 때 평상시보다 물을 조금 줄이고 소담하게 콩나물을 올려놓는다. 뜸이 들 때쯤에 달래를 송송 썰고 간장에 참기름을 넣어 양념을 하면 입안은 장날 약장사 패거리를 만난 노인마냥 기운이 난다. 헛간 귀퉁이에 저장해 두었던 배추로 된장국을 끓일 때 한줌 뽑아 넣어도 달큰한 배추맛과 어우러져 깔끔한 맛이 난다. 감기 기운이 있을 때는 묵은 지를 썰어 넣고 한웅큼 던져 넣어 푹 끓여 갓 지은 밥 말아 한 대접 먹고 나면 그깟 고뿔쯤이야 하게 된다. 그러나 고뿔에는 맑은 국물로 끓여내어 뽀얀 콩나물 자태를 들여다보며 얄궂게 고춧가루 한 숟가락 넣어 휘휘 저으며 먹고 아랫목에 청국장 뜨이듯이 솜이불 덮고 누워 땀 흘리고 나면 개운해진다.

이렇듯 밥상에서 요긴하게 쓰이는 콩나물의 영양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다. 비타민과 아스파라긴산이 풍부하여 숙취해소에 좋으며 섬유소를 함유하여 변비에도 개선효과가 있단다. 단백질, 탄수화물, 무기질, 올리고당이 적절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 피로 회복에도 좋으며 질병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면역기능을 높여준다. 혈압이 높은 이도 안정을 찾아주며 갱년기 여성도 도움을 준다. 어디하나 버릴 데가 없다. 어릴 적 콩나물을 많이 먹으면 키가 쑥쑥 자란다고 했다. 살림이 옹색하여 상에 올릴 것이 없어 한말만은 아닌 듯 하다. 더구나 콩나물이 물만 주어도 잘 자라 그리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집안마다 콩나물을 키워먹었지만 요즘은 시장이나 마트에서 판매한다.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무침이나 밥과 국으로도 자신만의 맛을 내며 온전한 밥상의 주인이 되기도 한다. 객이 된다하여 서운해 하지 않으며 맛과 영양을 골고루 갖추어 보답고저 한다. 생각해보니 콩나물은 온 몸을 바쳐 사람을 구휼하였다. 내 평생을 더듬어 이처럼 숭고한 사랑을 했던 적이 있던가. 그저 눈앞에 놓인 것을 내 것 인양 사용하는데 힘쓴 사람일뿐이다. 하지만 콩나물은 내가 태어나기 오래전부터 현재와 그리고 미래의 어느 날에도 누군가의 밥상에 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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