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주 선문대 교수  

[세상을 보며] 안용주 선문대 교수 

아침 운동을 위해 운동복 차림으로 라켓을 손에 들고 교문을 들어서려는 순간 M16으로 무장한 군인이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볼일인가라는 질문에 학교에 간다고 했더니 학교는 폐쇄되었으니 돌아가라 했다. 영문도 모른 채 쫓겨나는 등 뒤로 탱크 한 대가 커다란 포신을 한껏 치켜세우고 있었다.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오랜 군부정치로 태어날때부터 대통령은 한 사람밖에 본 적이 없었고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대학 예비고사를 앞둔 1979년 10월 26일, 갑자기 대통령이 피살되었다는 뉴스로 온 나라가 술렁거렸다. 고등학생이었던 우리들에게 대통령의 피살이 무었을 말하는지,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꿈에도 해 본적이 없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봄날에 탱크가 교문을 지키고, M16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교문을 둘러싸고 대학을 전면 폐쇄하는 일들이 벌어지면서,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군인들이 투입됐다는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하는 뉴스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광주라는 이름은 우리들 귀에, 뇌리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지금은 모두가 알지만 그때는 광주를 벗어난 지역에서는 아무도 광주의 진실을 알 수도 말 할 수도 없었다.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신군부 세력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 자기 상관을 체포하고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들이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단행시켰다. 이를 지켜보던 뜻 있는 민주지사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5월18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의 퇴진과 계엄령 철폐, 조속한 민주정부 수립"을 외치자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들은 시위 진압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자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사살명령을 내렸다.

이들은 계엄령을 빌미로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과 재야 인사 수천 명을 감금하고 군 부대를 동원해서 국회를 봉쇄하는 한편, 특수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를 광주로 보내서 운동권 학생들 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가하지 않은 일반 시민과 부녀자들에 대한 폭행과 폭력, 집단 발포를 통해 자국민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10일간 이루어진 광주의 민주화 운동은 전두환과 군부의 폭력으로 166명의 사망자, 54명의 행방불명자, 376명의 상이 후유증 사망자, 3,139명의 부상자 등 인명피해가 극에 달했다. 자국민을 보호하라고 만든 군인이 자국민을 살해하는 극단적인 잔혹함은 군대에게 살해명령을 내린 신군부에게 당연히 철퇴를 내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10여년이 넘도록 군부의 폭력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힌 채 왜곡된 역사를 간직하고 숨소리를 죽이며 살아와야 했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서야 비로소 ‘5.18민주화운동’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책임자들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었지만 아직도 일각에서는 북한의 소행이라며 5.18의 실상을 왜곡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오늘은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대한국민 모두가 광주에 진 빚이 참으로 크다. 오늘 날 우리가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숨을 쉴 수 있는 것은 모두가 돌아가신 광주시민들의 넋의 보살핌이다. 광주 시민들의 고귀한 희생을 밟고 우리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외칠 수 있다는 점이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만들어 졌지만, 아직도 광주시민과 대한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사살명령을 내린 진정한 수괴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40년을 숨기고 감추고 은폐한 진실들이 낱낱이 규명되어 나의 아버지, 형제, 자매일 수 있는 국민을 살해한 진범이 하루 빨리 밝혀져 억울한 이들의 한이 조금이나마 위로 받는 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한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으면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게 된다” 카뮈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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