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수요단상] 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속사정을 모르겠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저의가 무엇일까? 한 사람을 두고 이렇게 떠보려고 하거나 저울질을 한다. 사람마다 의도를 간직하기도 하고 숨기기도 하는 까닭이다. 협상주이라거나 모색 중이라는 말로 따지고 보면 상대편의 의중을 떠보고 손익을 계산한다는 심산이다. 이처럼 사람이 만나면 이해를 따지고 약점을 노린다. 숨기거나 감출 것이 없다면 매일 것도 없다. 그러면 자유롭다.

목숨을 걸었다. 성사가 안 되면 끝장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해치워야 한다. 이렇게 사람들은 중대한 일이 생기면 막가는 골목을 만들어 놓고 배수진을 친다. 그러다가 배수진이 무너지면 물귀신 작전을 쓰기도 하면서 자기 탓인 줄 잊어버리고 남을 원망하거나 팔자타령을 하거나 심하면 하늘마저 원망한다. 그러나 세상은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니며 내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진실을 안다면 무슨 일이든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고 목숨을 담보로 배수진을 치는 허욕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사람은 제 발목을 스스로 묶는 꼴이 되어 버린다.

벽창호다. 앞뒤가 꽉 막혔다. 제 생각만 하지 남의 생각을 모른다. 이것은 고집스러운 사람에게 던지는 험담이다. 사람의 일은 서로 얽혀있게 마련이다. 얽힌 것을 풀자면 매듭의 코를 찾아 한 가닥씩 풀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매듭을 풀지 않으려고 하면 실타래는 끊어지고 만다. 사람의 관계나 일이 끊어지지 않고 잘 풀리려면 서로 상대의 입장이 되어 보아야 한다. 남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면 고집이란 불 앞에 얼음처럼 녹아 버리게 된다. 이것을 이순(耳順)이라고 일컫는다. 무엇이든 고집할 것이 없으면 사로잡힐 것도 없다. 그러면 자유롭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것 때문에 세상에는 무수한 탈이 생긴다. 모든 것을 내가 정하고 남의 생각은 틀렸고 내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는 일 때문에 세상은 수없이 상처를 입는다. 하기야 나를 버렸다고 공언하기도 하고 마음을 비웠다고 선언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속셈은 딴전에 두고 말로만 그렇게 하는 경우를 수없이 봐왔다. 

참으로 나를 버린 사람은 막힐 것도 없고 매일 것도 없다. 이를 무심(無心)이라고도 하고 허심(虛心)이라고도 하며 무아(無我)라고도 한다. 석가나 공자나 노자는 다 같이 이를 실천에 옮겼다. 그래서 석가는 부처가 되었고 공자는 성인이 되었으며 노자는 도인인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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