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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연미당, 보자기에 서린 염원김윤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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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5.28  16:5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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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시평] 김윤희 수필가 

1932년 4월 29일 11시 40분,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 일본국가 기미가요가 울리기 시작한다. 쇼와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과 상하이 점령 전승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는 현장이다. 한 젊은이가 보자기에 곱게 싼 도시락과 물통을 손에 들고 소리 없이 무대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 5미터 즈음에 이르러 무대를 향해 물통 하나가 떨어져 폭발한다. 폭탄이다. 삽시간에 행사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재차 도시락을 던지려는 순간 젊은이가 체포된다. 윤봉길 의사다. 행사장은 마침 도시락을 준비하여 참석하게 되어 있었다. 물통은 저격용이었고, 도시락은 자살용 폭탄이었다.

도시락을 싼 보자기가 바로 충북의 여성독립운동가 연미당 선생이 만든 것이다. 한땀 한땀 그녀의 정성어린 바느질 손길에 서린 민족의 염원이 헛되지 않았다. 일본군 총사령관과 거류민단장은 목숨을 잃었고, 일본 각료 여럿이 중상을 입었다.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윤봉길 의사는 그해 5월 28일 사형을 선고 받고, 12월 19일 순국을 했다. 이로 인해 중국의 장개석은 한국인의 기백을 다시 보게 되었고, 상해에서의 우리 독립군을 지원하게 되었다. 백범 선생과 윤봉길, 그리고 백범을 그림자처럼 보필한 연미당과 그의 남편 엄항섭 등이 함께 모의하여 성공한 거사이다.

연미당은 증평출신 독립운동가 연병환의 딸이다. 본명은 연충효다. 1908년 북간도 용정에서 태어나 1920년 상해로 망명하여 인성학교와 진강여중을 다녔다. 1926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이듬해 엄항섭과 결혼하여 2남 4녀를 두고 남편과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참으로 잘생긴 여인이다. 외모에서 풍기는 당당함은 그의 활동에서 배어나온 결 곧은 마음에서 비롯되었으리라.

1930년대 초 임시정부의 특무조직인 ‘한인애국단’에도 남편과 함께 참여하여 단장 김구를 적극 지원했으며, 1931년 ‘상해여자청년동맹’ 대표로 참여하여 의연금 모금 등 항일연합전선 구축 운동을 주도하였다.

1936년부터 연미당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되어 의정활동을 하였고, 재건 한국독립당 여성당원,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대원이 되어 홍보와 위문활동을 하였다. 1943년 한국애국부인회 조직부장으로 복무하며 충칭방송에서 반일의식을 고취하는 방송과 국내외 여성 동포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는 선무 방송을 하였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7월, 광복군 제2지대와 함께 미군함을 타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6·25전쟁 시 남편이 납북되자, 어려움을 겪으며 고생하다가 1981년 1월 1일, 향년 73세로 별세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아버지 연병환은 중국으로 건너가 세관공무원으로 일하며 독립운동자금과 무기조달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남편 엄항섭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해 항일전선을 구축했고, 임시정부 선전부장과 주석판공 비서를 맡아 백범의 측근에서 활약했다. 딸 엄기선 역시 중국 측 방송을 통해 임시정부의 활동 과 일본군의 만행을 동맹국과 국내 동포들에게 알리는 등 온 가족이 3대에 걸쳐 독립에 투신하였다.

뿌리 깊은 충절은 거저 얻은 명성이 아니다. 이렇듯 대를 이어 핏속에 면면히 흘러온 기개와 결기가 오늘의 충북을 있게 한 것이리라. 5월의 숲이 푸른 혈맥을 타고 힘차게 내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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