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참전유공자 1427명… 충북 18명 거주
나정희씨, 여자의용군 참전… 통신병 활약
오은균씨, 경찰 출신… 공비색출 작전 참여

▲ 올해로 70주년을 맞은 6 25전쟁. 아직까지 현재진행형의 상처로 남은 그 민족적 비 극에서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데에는 남녀가 따로 없었다. 여자의용군으로 참전해 통신병으로 활약했던 나정희 할머니(왼쪽)와 경찰 출신으로 공비색출 작전에 참여 했던 오은균 할머니.

[충청일보 박장미 기자] 올해로 6·25전쟁 70주년을 맞았다. <관련기사 6면> 

수많은 청춘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장에 나섰고 그중 일부는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 유품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7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참전용사의 헌신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고 있다. 

당시 전장에는 여성 참전자들도 있었다. 국가보훈처 통계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여성 6·25 전쟁 참전유공자는 총 1427명이다. 이 가운데 18명이 충북에 거주하고 있다. 

나정희 할머니(89·청주시 상당구 미원면)는 23살의 나이에 여자의용군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6·25전쟁 발발 당시 인천 전화국 우편과에서 일했던 나 할머니는 피난 중이었던 1953년 여자의용군 3기 모집 공고를 보고 자원입대했다. 

나 할머니는 "혼란한 시기에 나라를 위해 무엇 하나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자원입대를 결정했다"며 "당시 어머니와 둘이 살고 있었는데 확고한 의지에 어머니도 별말씀 없이 보내주셨다"고 회상했다.

당시 여자의용군으로 입대한 대부분은 통신, 타자 등의 기술교육을 받았다. 필기시험과 신체검사를 거쳐 광주 보병학교에서 기초훈련을 받은 나 할머니는 후방부대에 배치됐다. 전쟁 통에 보급조차 원활히 이뤄지지 않아 남자 군복을 몸에 맞게 줄여 입고 타자수로 복무하며 상부의 명령, 입수한 정보 등을 전달하거나 행정업무를 담당했다. 

나 할머니는 4년여 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육군 상사로 1957년 8월 전역했다. 2002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나 할머니는 "비록 후방이긴 했지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섰던 당시의 내가 자랑스럽다"며 "목숨을 걸고 싸웠던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잊지 말길 바란다"고 말했다.

오은균 할머니(99·청주시 상당구 용암동) 1947년 경찰학교(여경 6기)를 졸업하고 순경에 임용돼 청주경찰서 사찰계에 근무하던 중 6·25전쟁을 맞닥뜨렸다.

전쟁 발발 후 약 3개월간은 청주시 낭성면 일원 산속으로 피신해 암약 활동하다가 국군의 서울 수복 후 청주경찰서 대공사찰 요원으로 복귀했다. 오 할머니는 어린 딸을 큰집에 맡겨두고 경찰의 자리로 돌아와 공비 색출 작전 등에 참여했다.

오 할머니는 "당시 어린 딸을 안전하게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과 경찰의 의무와 신념 사이 깊은 고민을 했다"며 "딸을 위해서 나라를 지켜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설명했다.

25년간의 경찰 복무를 마치고 1972년 경위로 퇴임했다. 2002년 9월 충북지방경찰청의 추천으로 전쟁 당시 공적을 인정받아 참전유공자로 등록됐다. 오 할머니는 "당시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다"며 "현재 세대들도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청주에 사는 이현원 할머니(87)는 군 간호사관학교 1기생으로 6·25전쟁 당시 육군 간호장교로 참전했지만 지난 4월이 돼서야 유공자로 등록됐다.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의 외손이기도 한 이 할머니는 직접 총을 들고 전투에 참전하지 않아 참전유공자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국가보훈처가 국군간호사관학교 명단을 확보해 지자체를 통해 생존 여부와 거주지 확인 절차를 거쳐 이 할머니가 참전유공자로 등록될 수 있었다. 이처럼 여성 참전자들은 의용군부터 경찰, 간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6·25전쟁 참전용사라고 하면 대부분 남성을 생각할 뿐 여성 참전유공자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나라를 지키는데 남녀의 구별은 없었다. 고령으로 세상을 등지는 6·25 전쟁 참전용사들이 늘고 있는 만큼 그들의 헌신을 다시 한번 되새겨봐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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