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종환 중국 칭화대학 SCE 한국캠퍼스 교수 ·한국자산관리방송 논설실장

 

[충청논단] 황종환 중국 칭화대학 SCE 한국캠퍼스 교수 ·한국자산관리방송 논설실장

길마중길 산책로 숲길에 내리는 빗줄기가 그치는가 싶더니 햇빛이 푸른 나뭇잎 사이로 옹골차게 내리쬔다. 머리에 쓴 모자에 배어있는 땀과 빗방울을 짜내면 초록물이 금방이라도 뚝뚝 떨어질 듯하다. 하물며 햇살을 가득 채운 숲속의 나뭇잎은 과연 어떠할지 생각만 해도 시원하고 뿌듯하다. 짙푸른 나뭇잎 향기로 물든 숲길에 잠시 머무는 순간 지친 몸과 마음은 비취빛 바다에 푹 담갔다가 나온 것처럼 싱그럽고 편안해지는 느낌이다. 한낮에 인적이 드문 산책길을 무념무상하게 걷다 보니 멀게 느껴지던 목적지에 금세 다다른다. 힘든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해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축복이다.

삶에 지쳐 힘들고 외로워질 때는 초록빛 나무향이 발산하는 숲속에서 서성거리는 일도 나름대로 괜찮을 것 같다. 바람이 왜 숲속에서 머물러 있는지, 바람소리는 왜 외롭다고 외치는지, 아직 가야할 길이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한참 동안 침묵하며 숲속에 머문다. 석양의 붉은 노을도 시간이 지나면 검고 어두운 밤으로 찾아온다는 사실에 스스로 위로를 받는다. 저무는 해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아쉬움을 드러내는 순간 마음이 숙연해진다.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누군가와 약속한 일이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세상의 관심과 이목을 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정치인 경제인 학자 연예인 체육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이들의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일거수일투족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하지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사람들만 사연과 상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길가의 풀잎도 상처가 있듯 평범한 사람들도 사연과 상처가 있다. 어떤 사람이라도 바다를 메울만한 사연 하나쯤은 가슴속 깊이 묻어두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아마 땅을 덮을 만큼 넓고 깊은 상처일지도 모를 일이다. 누군가 상처를 보듬어주면 새살이 되고 방치해두면 굳어져 흉터로 남게 된다.

생각해보니 필자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상처나 불안을 혼자 잘 견뎌내는 일에 나름대로 익숙한 것 같다. 다르게 표현하면 몸과 마음의 변화를 제때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감각이 둔한 편이라는 말과 다름이 아니다. 20대 초반에 뱃속이 더부룩하고 불편하였을 때 단순히 소화불량이라 생각하여 병원 처방전 없이 약국에서 구입한 약을 며칠 복용하다가 복막염이 되어 당시에는 제법 큰 수술을 받았었다. 그리고 최근 상처부위의 통증을 단순한 근육통으로 여기고 계속 운동하다가 대상포진이 확대되어 견디기 어려운 아픔을 겪고 있다. 뱃사공이 노를 놓쳐버리고 나서야 할 일이 없어져서 비로소 넓은 물을 바라보았듯이 아픔을 겪고서야 주위의 아픔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아픔과 불안은 일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었다. 큰 사찰에는 대개 108계단이라고 불리는 계단이 있다. 가쁜 숨을 내쉬며 마음속 번뇌를 모두 내려놓을 때 비로소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다. 숨을 몰아쉬며 발걸음을 옮길 수도 있고, 힘들면 오르던 길에 주저앉아 숨을 고를 수도 있다. 높고 길게 펼쳐진 계단을 바라보며 묵묵히 땀 흘리며 올라가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 때로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듯이 내일은 오늘과 전혀 같지 않을 수 있다.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길목일지라도 출구는 반드시 있다. 고뇌를 떨쳐내고 멀리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는 냉정함과 객관성을 잃지 않는 일이 중요하다.

태풍이 몰아치고 폭우가 쏟아지는 들판 한가운데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모진 풍파를 정면으로 맞서며 버티고 서 있다. 아울러 주위의 풀잎들은 비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린다. 비바람을 맞으며 버티는 연약한 풀잎이 상처를 위로해달라고 속삭인다. 나그네는 꺾어진 나무의 상처를 보고서는 안타까워하지만 초라한 풀잎의 상처에는 관심조차 없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연과 상처들이 있다. 어떤 상처는 위로를 받지만 반대로 위로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상처들이 많이 있다. 들녘에는 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풀잎과 꽃도 있다. 풀잎과 꽃에도 상처가 있다. 이제 상처를 위로해줄 수는 없을까. 들녘에 앉아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순간 상처 난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때로는 상처 많은 풀잎들이 가장 아름답고 향기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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