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는 불가피하게 주례를 세게 되었다. 아직은 이르다 싶지만 대학에서 재직하다보니, 또 주변에서 강력하게 권하는 경우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맡게 되었다. 주례를 맡으면서 난감한 것은 내가 새 출발하는 그들에게 어떤 귀감의 말을 남길 것인가 하는 전이다. 물론 입에 발린 좋은 말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그래도 그들에게 절실하게 들려주어야 할 말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꼭 주례를 맡을 때가 아니라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삶에 대해서 일러줄 때에 당면하는 일이기도 하다. 일단 우리 삶은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먼저 남에게 베푸는 삶, 둘째로는 똑같이 나누는 삶, 셋째는 내가 누리고 남은 것은 남에게 나누는 삶, 네 번째 삶으로는 남는 것이라도 나누지 않는 삶일 것이다.

나는 이럴 경우 예를 들어서 설명하곤 한다. 떡이 한 시루 생겼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먼저 자신이 먹지 않고 남에게 나누어주는 삶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은 대단히 숭고한 삶으로서 나조차도 실천하기 쉽지 않다. 물론 이러한 삶을 살다가 간 사람들이 있다.
가령 테레사 수녀라든가, 인도의 간디 같은 분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삶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자신이 없다. 보편적으로 우리 삶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음에 떡이 생기면 남들과 똑같이 나누는 삶이 있다. 이것은 자신의 우선권과 가치보다 함께 하려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다. 사실 이쯤에서 보면 가장 합리적이고 타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삶도 강요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성취된 것을 남과 똑같이 나눈다는 것은 자기희생과 양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우선 자신이 충분히 누리고 남는 것을 남에게 베푸는 삶을 떠올릴 수 있다. 나의 것이지만 내가 누리고 남을 경우 남에게 베푼다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또한 양보의 정신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신이 충분히 누리고 남는 것이 있어도 절대로 남에게 베풀지 않는 삶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는 표면적으로 보면 부정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성취한 결과란 그 사람의 것이 분명한데 남는다고 남에게 베풀 필요가 있느냐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도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삶을 가장 중요한 모델로 제시하고 가르칠 것인가. 그런 점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사는 데는 사회라는 울타리가 있다, 그것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성과라 하더라도 자신만을 위해 누리기보다, 자신이 충분히 누린 다음이라면 그것을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함께 하는 중요한 삶일 수 있다,

그렇다. 나는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학문 이전에 삶을 가르칠 때 첫 째의 삶을 가르칠 수 없다. 그것은 가장 좋은 것이나 우리 삶에서는 거의 실현 가능성이 적다. 그러므로 나는 세 번째의 삶을 기본으로 제시한다.

즉 자신의 것이라도 누린 다음에는 다른 사람과 나누는 삶을 살아라.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출발하여 함께 나누는 삶을 지향해 가라. 그러나 그것 또한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도 우리는 그것을 지향하는 정신의 가치와 소중함은 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 김완하 한남대 문창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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