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기 충청일보 편집국 부국장

 

삶이란 긴 여정 이후 우리들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룰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이다.

죽음은 한 생명의 탄생이 이뤄지면서부터 내정된, 피할 수 없는 종착역이다.

웰빙과 웰다잉이 우리들 앞에 화두처럼 던져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두 단어의 의미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과 비할 바 없을 만큼 무겁고 깊다.

'잘 산다는 것'과 '잘 죽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의 의미를 넘어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근원적 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 앞에 숙연해진다. 그 죽음에서 '나'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우리 사회의 진보적 변화를 이끌어온 사회 혁신가, 3선 서울시장으로 시민들과의 교감을 이루며 활발한 시정 활동을 펼친 행정가. 한국 사회에 시민운동의 씨앗을 뿌리고 길러온 인물로 1994년 참여연대 설립을 주도하고 반부패, 정치개혁, 사법개혁, 재벌개혁 등 오랜 기득권의 고리들을 끊어내는 운동에서 선구적 역할을 해온 그였기에, 게다가 잠재적 대권주자로 늘 하마평에 오르내리며 그가 가졌던 삶의 철학이 아직까지 척박한 우리 사회의 정치적 지형에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기대감을 주었던 그였기에 그것은 충격적이었다.

가슴이 먹먹해졌던 정치인 둘이 있었다.

고 노무현 대통령과 고 노회찬 의원. 그들의 죽음이 지닌 공통적인 특징은 냉혹하기 그지없었던 정치판에서 아웃사이더였던 그들이 가졌던 작은 흠결을 그들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것이었다.

황망하고 애통하고 당혹스러운 것은 그때나 이제나 다를 바가 없지만, 그래도 결이 다른 부분이 있다.

박 시장이 숨지기 전날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아직까지 진실이 무엇인지 가려지지 않았고, 시각에 따라 용납할 수 있는 범위가 다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팩트로 확인된다면 박 시장의 죽음 앞에서 그를 평가하는 데 큰 흠결로 남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박 시장의 죽음이 성추행 혐의와 관련이 됐든, 혹은 다른 어떤 이유에서였든 아직 확연하게 나타난 사실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합리적 의심'의 외피만 뒤집어 쓴 추론과 예단만 무성할 뿐이다.

그의 죽음조차 진영논리의 호재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만 커진다.

"본인이나 입 닥치고 애도하라"는 저급한 논객의 말은 논외로 치더라도, 확인되지 않은 페이크 뉴스가 온라인을 도배하고 있는 것을 보면 "도대체 우리사회의 '품격'이란 것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나" 하는 쓰린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고소 당사자에 대한 신상털기 등으로 2차 피해를 획책하고자 하는 것이나, 정해놓은 예단의 칼날로 고인을 난도질 하는 것이나 저열함의 강도는 도긴개긴이다.

박 시장 스스로가 죽음으로 '응답'한 것의 기화점이 무엇인지 차분하게 지켜보며 사회적·윤리적 규범의 틀을 재정립해 나아가는 출발점으로 삼아도 좋을 듯싶다.

"모든 분에게 죄송하다. 내 삶에서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는 박 시장의 마지막 말을, 그를 조용하게 떠나보내는 아량으로 삼아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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