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정숙 수필가

[백목련] 육정숙 수필가

빗소리에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훅 들어왔다. 기분이 상쾌했다.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데 창 앞에 앉아 빗소리와 바람의 향기를 마중 하는 중이다. 풀 향기가 온 몸을 감싼다. 녹색 향기의 결이 시원하게, 온 몸으로 휘감겨 오니 혈관이 정화 되는 느낌이다.

나뭇잎들도 비를 맞으니 더욱 생기가 인다. 그 나뭇잎으로 톡톡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들이 환상적이다. 나뭇잎 적시는 소리에 마음이 차분해진다. 출근 준비로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아침 시간을 느슨하게 해준다. 다행히 정해진 출근이 아니니 더욱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사각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공간은 선명하게 다가서고 그림 같은 초목들은 싱그러움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다. 어느새 움쑥 움쑥 자란 초록 이파리들이 낯설었다.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계절이 바뀌고 한 해의 반이 지나고 있다는 것을. 올 해 봄꽃이 핀 것을 보았던가!

동행했던 시간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시간들이 성큼 다가와 곁을 서성이고 있다. 산다는 일에 팍팍했던 시간들을 헤치느라 내 자신에게도 곁을 내주지 못했구나!

높다랗게 솟은 회벽들, 바닥으로 낮게 자라는 풀잎들이며 정원의 온갖 초목들이 생기를 얻어 촉촉해진다. 내 주위 모든 공간들이 습으로 가득 차오르는 날이다. 습하다는 것은 축축하고 눅눅하여 개운치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너무 건조해 메마른 것도 불쾌감을 준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보다는 적당히 오가며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조용하게 대지를 적셔주는 비는 무언가를 골똘하게 생각 할 여유를 내준다. 특히 지나간 것들에 대하여.

오랜만에 감성을 흔들어본다. 비를 따라 울적한 기분에 빠져 보는 일도 제법 괜찮을 것 같지 않은가! 내게 묻는다. 밝고 화창한 날은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에 근육들이 분주해진다. 하지만 차분하게 내려주는 비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유 없이 울적해지고 무기력해 지기도 한다. 그래서 또한 안주 하지 못하고 삶의 언저리를 방황하기도 한다.

우리의 삶! 역시 날씨 같은 것이다. 슬픈 날, 기쁜 날, 또한 좌절할 때도, 억울할 때도 있다. 그리고 즐겁거나 행복 하거나 감동적인 날일 때도 있다. 변화무쌍한 날들에서 벗어나 오늘처럼 비가 차분히 내려주는 날엔 그 어떤 상황이든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고 잠시 쉬어 가려 한다.

내 삶은 늘 즐겁고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잠시라도 시간을 내려놓고 싶지 않았었기에 삶 속에서 늘 긴장했고 늘 동동 거렸다. 내 삶의 의미를 어디에 두었는지조차 잊고 살았다. 빗물이 흐르듯 감정과 기분을 흐르는 대로 놓아 둔 적도 없는 것 같다.

지금 내리는 저 빗물도 땅으로 스며들 곳이 없다. 어디로 흘러 갈 것인가! 결국 스며들 곳을 찾아 어딘가로 흘러 갈 것이다.

이 비 그치고 나면 온갖 생명체를 품은 대지는 촉촉해지고 나무와 풀들과 꽃들은 생기를 얻어 한층 더 자랄 것이다. 성큼 성큼 다가오는 올 여름도 태양의 열정이 대단 할 것 같다. 나이 들수록 자연에 더욱 더 가까이 하고 싶어짐은 또한 자연의 섭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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