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일보 사설] '북의 김일성 남의 이승만/ 모두가 없어지지 않는 한/ 나라의 평화통일은 기대 못 한다'
일제에 비타협·불복종으로 맞섰고 항일운동 자금을 마련하다 체포됐으며 모진 고문 끝에 걸을 수 없게 됐던 유학자 심산(心山) 김창숙이 쓴 '심산 유고' 중 한 구절이다. 여기서 언급된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다.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벌였으며 박사 학위 취득 후에는 다시 우리나라에 돌아와 교육과 기독교 활동에 주력했다.
3·1 운동 이후엔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에 임명돼 잠시 상하이에 머물렀다. 1925년 미국 대통령에게 우리나라를 국제연맹이 통치토록 해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임정으로부터 탄핵을 당했다. 해방을 맞은 1945년 한국에 돌아온 이승만은 미국의 지지를 받는 우익 지도자로서 세력을 키워갔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6·25 전쟁 중 헌법을 바꿔 다시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전쟁 후엔 연임 규정을 없앤 헌법 개정안을 불법적으로 통과시켜 또다시 대통령에 당선됐다.
1960년 3·15 부정 선거에 분노한 국민들이 일으킨 4·19 혁명을 맞으며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하와이로 망명했고 그 곳에서 5년 후 세상을 떠났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이 확연히 갈린다. 긍정적인 부분은 농지개혁법 시행, 의무교육 실행, 일본에 대한 독도 문제 초강경 정책, 한미상호방위조약, 경제 개발 초석 마련, 국익을 위한 환율 정책 등이다.
반면 서북청년회, 제주 4·3 사건과 보도연맹 사건은 부정적이다.
특히 6·25 당시 한강 인도교 폭파시킨 사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해체에 영향을 줘 친일파 청산을 방해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19일은 이승만 대통령의 55주기였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 대통령이 보여준 공(功)과 과(過)를 논한다는 건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로 보인다.
공(功)을 내세우는 쪽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처럼 우리나라 경제 개발의 초석을 세웠다는 점을 잘 한 일로 든다.
과(過)를 내세우는 쪽은 이승만 대통령의 경제 개발은 시간이 해결해줬을 문제이며 그가 보여줬던 여러 행적들이 그의 공(功)을 덮고도 남는다고 주장한다. 포털에 등록된 이승만 55주기 기념식 관련 기사에서도 이를 두고 치열하게 맞붙는 댓글들을 볼 수 있다.
판단은 온전히 자신들의 몫이지만 이것 하나만은 기억하자. 제대로 된 역사인식이 있어야 진정한 민주주의가 기능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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