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충북대 교수

 

[충청의 창] 김성수 충북대 교수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체에서 자신 이외의 존재가 대신해 줄 수 없는 것들 중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을 꼽으라면, 생로병사가 아닐까 한다. 또한 살아가는 생로병사의 삶에 동반되는 고통은 각자의 몫이라면 너무 잔인한 현실은 아닐까 한다. 어찌되었든, 인간도 이런 우주 안의 다양한 생명체 중에 하나에 불과한 사실에서, 삶에서 거쳐야만 하는 고통을 어떤 형태로든 짊어지고 가야한다.

이 고통은 어쩌면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도 더 무섭고 아프게 느껴질 수도 있다. 물론 생명체마다 다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생명체는 주위의 자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생명체가 고통 받는 것에 대하여 목숨을 버릴 정도로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타인의 고통을 안타까워하는 마음과 모습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연민으로 끝나 버리는 고통의 인지 정도에서부터 귀중한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하는 경우까지 아주 천차만별이다. 어떤 경우에 인간은 진정 타인의 고통을 같이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아픔을 같이 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어쩌면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사자가 생존을 위하여 동물을 잡아먹듯이, 인간도 하루에 수많은 생명체들의 생명을 빼앗고 그 생명체들을 섭취하면서 살아간다. 존재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선택이라 한다. 정말 그럴까?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도 기본적으로 생명체들은 서로에게 잔인한 것은 아닐까? 자신 이외의 생명체들의 아픔을 모든 개체가 즐기고 있는 측면이 있는 것은 아닐까?

호랑이 새끼들이 사냥한 어린 노루하나를 잡아 놓고 가지고 장난치듯 사냥연습(?)을 하다가 결국에는 목을 물어 죽이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더 잔인할 수 있기에 먹이사슬에서 맨 꼭대기를 차지한 것은 아닐까? 인간도 인간의 목숨 건 결투의 잔인성을 즐긴다는 것은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로마 시대의 원형경기장의 인간들은 인간과 인간의 대결, 짐승과 인간의 대결, 그리고 짐승과 짐승의 대결의 결과로, 그 결투장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는 생명체의 모습을 향하여 환호성을 지르는 인간의 모습에서 인간의 잔인성을 볼 수 있다. 닭싸움, 개싸움, 소싸움, 그리고 여러 동물이 죽도록 싸우다 생명을 잃는 과정을 우리 인간은 즐기고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진화해서 그런 잔인성이 감소되었다고 한다, 정말일까?

요사이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는 가상게임에서는 더욱 더 잔인해진다. 가상이라는 공간에서, 인간의 잔인성을 확인하고 실습한다. 그래서 더러는 현실에서 모방범죄로도 나타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컴퓨터 화면에서는 붉은 피로 도배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오락을 즐기는 인간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겉으로는 거룩한 표정을 지으면서 가상의 죽음을 관망하고 강요하고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하여 환호성을 즐긴다. 참으로 잔인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란 사실이 씁쓸하다.

이러한 잔인성은 사회 구조의 전반에 다양한 형태로 형성되어 있다. 서로가 사냥의 대상이 되어 있는 약육강식의 사회구조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쩌면 그 어느 동물의 세계보다도 더 잔인한 특성을 갖고 있다. 아군과 적군의 형태로 서로 죽이고 죽으면서 영역을 확보하는데 열광하는 인간은 분명 상상을 뛰어 넘는 잔인성을 갖고 있다.

사회의 구성원은 좋든 싫든 서로 다양한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 관계라는 연결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그 연결의 고리는 서로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인간의 잔인성이 나타날 수 있는 연결고리의 경우에,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결정지어진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연민이나 동정도 인간의 잔인성이 즐기는 관음성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타인의 고통을 같이 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인류역사를 통하여 수 없이 많은 성인들이 서로를 사랑하라고 부르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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