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수요단상] 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코로나는 우리 일상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이 상황이 장기화 될수록 변화의 폭도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한 우리 삶의 변화는 이 사태가 끝남과 동시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것인가? 지금 당장이라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종식된다면 우리의 삶은 다시 코로나가 없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이후’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인한 몇 가지 변화는 이 사태가 끝이 나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처음 이 땅에 왔을 때 많은 사람들, 특히 구약성경과 모세의 율법에 더욱 열심을 내던 사람들에게 그 상황은 별로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가 선포하는 말과 그의 행동은 율법에 위배되는 것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더 많은 무리가 그러한 예수를 지지하며 따랐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로 인한 변화를 끝내기로 작정한다. 예수를 죽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결정을 하면서 당시 유대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는 자신들의 계획에 대해 이와 같이 말한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요 11:50)

그들은 예수로 인한 변화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 변화를 멈추기 위해 예수를 죽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서 더 많은 이들의 유익을 위한 거룩한 희생이라고 자평했다.

시대의 변화는 몇몇 사람들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거대한 댐의 수문이 모두 열리면서 엄청난 양의 물이 한꺼번에 흘러 내려가는 모습과 같이 한 번 시작되면 그 흐름을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아주 큰 힘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당시 사람들에게 변화로 인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요 16:21)

변화의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 변화의 크기가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변화 그 자체는 마치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 느끼는 ‘해산의 고통’과 같이 크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변화는 해산의 고통과도 같은 변화의 과정을 다 잊게 만들정도로 우리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새로운 변화 그 자체가 바로 우리가 나아가야할 올바른 길이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인한 고통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거대한 변화를 우리에게 가져왔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이와 같은 변화를 어떻게 해서든지 거부하며 버틸 것인지, 아니면 이 변화를 그래도 인정하며 더 나은 삶을 위한 기회로 삼을 것인지의 선택하는 일이 아니다. 이 변화의 흐름을 어디로 향하게 할 것인지, 그 방향의 문제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변화의 과정이 고통스럽다는 것은 이와 같은 선택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변화가 주는 결실의 크기가 더 크고 유익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민은 변화의 유무를 선택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변화의 방향을 어떻게 해서 우리의 유익으로 삼을 것인지에 있어야 할 것이다.

비록 변화의 시작이 우리가 원치 않은 일로 인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미 그 흐름은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쏟아져 오는 변화의 물줄기를 막으려하기보다는 그 물줄기를 우리의 삶에 더 유익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겠는가!

지금은 바로 그러한 순간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해 흘러오는 거대한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다. 그 거대한 흐름을 보면서 그저 두려워하며 바라보고만 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변화를 멈출 수 없다면 최대한 그 변화를 이용해야 한다.

‘위기’와 ‘기회’는 말 그대로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결정되는 아주 사소한 차이인 것을 기억하라.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