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수필가

[백목련] 이향숙 수필가

이 십여 년간 해온 일이지만 이 앞에 서면 긴장이 된다. 다른 생각은 물론 숨을 쉬는 것은 더더욱 안될 일이다. 그래도 지나온 세월을 믿으며 날카로운 눈썰미로 노련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아무리 신중해도 크기가 제각각이다. 어쩌면 자로 잴 수 없기에 당연한 일이다. 그리하여 두부판 위의 두부는 늘 공평하지 않다. 생긴 대로 앞에서부터 차례로 드러내야 서로 부딪쳐 깨지지 않으며 모양새도 가지런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이 많지 않으니 작은 것을 달라고 말하며 눈으로는 그중 가장 큰 것을 바라본다. 

요즘은 포장두부가 가족의 수에 따라 한 번에 먹을 만한 양으로 만들어 낸다. 아기 손바닥 만 한 것부터 그것의 배요. 배의 배만한 것들이 진열되어 있다. 큰 기업에서 앞 다투어 내어놓아 종류도 다양하다. 원산지에 따라 몸값은 천차만별이고 유기농이라 이름 붙여진 것은 최고의 예우를 받는다. 옛날 방식으로 맷돌을 돌려 식감이 남다른 것도 그예 못지않은 영광스런 작위를 얻는다. 사람이 먹는 것이니 어디에서 무엇으로 만들었으면 설마 못 먹을 것을 넣었겠냐며 저렴한 것으로 고르는 이도 몸값을 내려 감사 행사를 할 땐 눈길도 주지 못하던 것을 덥석 집어 든다. 

한때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권세를 누리던 재래식 판 두부가 대기업의 행차에 뒷방 늙은이가 되었다. 하루 대 여섯 판은 거뜬히 팔아 치우던 것이 두 세 판으로 줄었다. 조상님 젯상에 올리거나 만두를 빚을 때 겨우 선택을 받는다. 그리하여 명절에는 산더미처럼 쌓아 놓는다. 한꺼번에 서 너 모씩 나가면 흥이 난 두부장사 허리 아픈 줄 모른다. 가끔 재래식 두부를 찾으며 맛의 깊이에 대해 논하는 이를 만나면 참으로 반갑다. 자르다가 떼어 내 맛을 보면 그 맛은 어린시절 우리 집 두부 만들던 날 부엌으로 들어가게 된다. 

수증기가 가득한 부엌에서 어머니와 아주머니들이 두부 틀에 무명천을 깔고 몽글몽글 엉긴 순두부를 부으시는 풍경이다. 뜨끈한 순부두에 간장 양념을 하여 할머니께 먼저 드렸었다. 한쪽에선 묵은지를 잘게 썰어 들기름을 듬북 넣고 볶아내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와 아버지들이 막걸리를 드셨었다. 그쯤 되면 동네 아이들이 잔칫집 과방 앞에 모이듯이 들어섰다. 아이들과 둘러앉아 먹을 적엔 두부의 맛을 알고 먹은 것이 아니라 순전히 양념 덕분이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서야 그 맛을 음미하게 되었다. 

재래식 두부를 자르며 추억을 더듬어보고 세상의 공평함을 생각한다. 열심히 살아 낸 것이 가끔은 지나친 욕심으로 비춰지기도 하고 아끼고 모아 이루어 놓은 재물이 허물이 되기도 한다. 같은 값이면 조금 더 큰 두부로 가족을 위해 풍성한 밥상을 차리고 싶은 주부의 마음이 누군가의 몫을 탐낸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영혼을 살찌우고 육체를 건강하게 하는 모든 일들이 욕심을 비우고 가능한가.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콩도 간수를 만나 완벽한 음식, 두부가 된다. 

오늘도 비장하게 호흡을 멈추고 두부 판 앞에 선다. 완벽 할 수 없지만 누군가는 기꺼이 양보하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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