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충북대 교수

 

[충청의창] 김성수 충북대 교수 

우리나라의 여름은 늘 장마를 동반한다. 장마는 무덥고 습한 한증막으로 모두를 지치게 한다. 시원한 바람이라도 느껴보고자 산에 오르면, 숲은 아직도 습하고 바람도 시원하지 않다. 산의 산책로는 축축하고 무너지고 끊어진 길로 숨이 턱턱 막힌다. 산길에 장마가 몰고 온 참상은 처참하다. 많은 커다란 나무가 부러지고 쓰러져서 시체로 드러누워 있다. 커다란 나무의 뿌리는 깊숙이 땅에 박혀 있을 것이라 굳게 믿었는데 말이다. 커다란 나무는 하늘로 치솟은 것만큼 땅 속으로도 수직으로 깊이 고층빌딩처럼 깊이 박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꼭 사실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여기저기 부러져 너부러진 나뭇가지는 몸체를 쓰러뜨리고 말았다. 가지가 많은 나무는 비바람에 쉽게 균형을 잃고 가장 약한 쪽으로 뿌리가 끊어진 채 누워버린 것이다. 장마는 무섭다!

들판은 물이 많이 넘쳐흘러 재산과 생명을 앗아가기도 했다고, 산골짜기의 가옥은 더러 산사태로 무너져 내려 다수의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기도 했다. 이렇듯 재산과 인명피해가 유발된 집중폭우는 우리 장마의 고질적인 문제이다. 이러한 난제가 쉽게 해결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회적인 문제나 정치의 문제라기보다는, 자연의 특성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어쩌면 자연의 몸짓을 인간이 아직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연이 이러한 장마를 통하여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 저 침묵 속의 말의 뜻을 못 들은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옛 고사에 물길을 잘 다스린 왕이 훌륭한 왕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물을 잘 다스린 지도자가 훌륭하다는 말이리라.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결국 자연은 다스리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역설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물이라는 존재를 다스리기 위하여, 강의 물길을 막고, 흐름을 변형시킴으로써 보다 인간 친화적인 자연을 원했던 것은 아닐까?

어느 날인가 비행기에서 지상을 내려다보고 실소를 혼자 터뜨린 경험이 있다. 그 높다던 빌딩도 산봉우리도 모두가 다 어쩌면 그렇게 땅에 납작 붙어 있던지, 그 모습이 너무 유치해(?) 보였다. 인간이 지구의 지표면에 붙어 살아가는구나! 비행기에서 바라다보는 인간의 살아가는 모습이 뭐 그리 대단해보이지 않았다. 아! 그것이 인간이 소유한 과학의 엄연한 수준이었다. 혹자는 이 황량한 우주의 공간으로 뻗어나가는 인간의 모습은 훌륭하다 못해 숭고하다고도 한다.

비록 현실은 높은 하늘에서 보면, 보잘 것 없는 작은 존재이지만, 이제 인간은 지구를 벗어나 우주로 향하는 과학까지 이해의 영역을 확대하여 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해마다 피할 수 없는 장마철의 아우성이 해결되어지지 않는 동안에는 인간의 관심은 지구를 떠날 수가 없다. 인간이 자연에 적응된 발달된 과학기술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 자연의 횡포를 벗어 날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자연은 위대하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은 그 위대한 자연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몸에 맞는 도구와 지식을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위대한 자연의 언어를 이해하여야만 한다. 장마를 비롯한 모든 재해는 자연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절대 침묵하고 있지 않다! 인간은 겸손한 자세로 침묵하는 자연의 소리를 더 세심하게 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우리의 과학은 더 발전되어야 한다.

어찌되었든, 장마가 지나간 하늘은 더 파랗고 더 뜨거운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때 되면 할퀴고 지나가는 자연의 품성은 잔인하고 인간의 과학의 한계는 냉정하다. 그러나 언제인가는 인간의 노력은 자연과 함께 할 수 있는 필요한 과학의 힘을 보유할 것이고, 그 형식과 방법이 어떠하든, 이러한 인간의 노력은 분명 자연과 함께 새로운 시대의 장을 열어 갈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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