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자칫 빠지게 되는 오류가 '다름'과 '틀림'이 같지 않다는 것을 잊는 것이다. '다름'에 연계해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느낌의 차이, 생각의 차이, 사상의 차이, 문화의 차이 등등 열거하기 힘들만큼 많다. '다름'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나'와 '상대'의 관계에서 느낌과 생각과 사상과 문화 등등의 차이를 존중하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역사적 비극의 연원은, 바로 나와 상대의 '다름'을 인정하거나 존중하지 못하고 '틀림'으로 고착화시킨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나의 신이 아니면 무조건 배척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본 종교전쟁이 그렇고, 약소 국가와 민족, 부족을 교화시켜야 할 미개한 대상이라며 식민지로 삼아 침탈하고 착취한 제국주의가 그렇다. 그것은 국가대 국가, 민족대 민족이라는 역사의 거대한 주체들 간에 벌어졌던 일만은 아니어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든 관계가 다름과 틀림을 동일시하는 오류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은 현재진행형이다.

'다름'과 '틀림'의 경계선
20대 직장인 누구에게서나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복장이었다. 검은색이 섞인 붉은 계열의 체크무늬 원피스를 입고 지난 4일 국회 본회의장에 등장한 정의당 류호정 국회의원은 젊고 발랄해보였다. 그 정도로만 보아 주었으면 끝날 일이었다. 
여성혐오를 기반한 왜곡된 시선들이 쏟아졌다. 그의 원피스는 '국회에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라는 논란을 넘어 성희롱적 발언으로 도배됐다. 여기엔 진영이 따로 없었다. 친여 커뮤니티와 극우 성향 누리꾼들의 "튀고 싶은 걸(girl), 예의없는 걸(girl)"이라는 조롱성 글에 "국회는 성매매 영업중" "티켓다방 생각난다" 등 악성 댓글까지 입에 올리기 민망한 내용들이 잇따랐다. 품격 떨어지는 일이다. 일부 언론은 류 의원이 그동안 국회에서 입은 옷을 '화보'로 만들어 게재했다. 말려야 할 언론이 남성 중심적 사고방식의 구태를 앞장 서 부추기는 꼴이다.

원피스 하나로 '꼰대'들을 깨다
'국회의원 품격'에 맞는 옷에 대한 논란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3년 당시 유시민 개혁당 의원이 '백바지'를 입고 등원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호되게 맞았다. 동료 의원들은 특히 예의에 어긋난다거나 평상복 등원선서를 지켜볼 수 없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도 했다. 결국 그는 다음날 정장차림으로 선서를 했다. 벌써 17년 전 일이다. 그만큼 세월의 무게가 더해졌음에도 다름을 존중하지 않고 틀림으로 매도하는 일들이 사회적 통념처럼 자리잡고 있다. 국회의원의 품격이 옷차림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는 없다. 정장차림이라서 그들을 존경하는 것도 아니다. 획일화된 정장 유니폼이어야 완장을 찼다는 자부심으로 시간의 꺼풀은 저토록 많이 벗겨졌는데도 나와 다른 복장을 '경박함'으로 매도해버리는 완고함이 그들만의 리그에선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싶다. 류 의원이 7일 "언론은 오늘도 '원피스'를 묻는다. 제 마음은 착잡해졌다"고 말했다.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비난이 '스물 여덟의 여성'에겐 버거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원피스 등원'은 의도된 거였다. 그는 지난 3일 '2040 청년다방' 창립행사에서 입었던 분홍색 원피스를 본회의에 입고 나가겠다고 약속했고 실행했다. 의도가 있었다면 당당한 대처가 필요한 법. 그는 이제 스물 여덟의 여성이 아닌, 독립된 입법기관인 국회의원이다. '착잡해질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응' 해야 한다. '원피스'의 유연함으로 '정장'의 완고함을 깨뜨려야 한다. 노타이나 티셔츠, 캐주얼 복장을 경박하다 여기고 정장을 마치 영국 판사들의 가채인 양 삼으면서 양복으로 세운 50대 남성만의 국회를, 그가 원피스 하나로 균열가게 만들었다는 것만 해도 큰 성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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