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순 전 복대초 교장 ·시인

[박별칼럼] 박종순 전 복대초 교장 ·시인

지난 봄 매화필 무렵 강릉 오죽헌에 다녀온 일이 있다. 사임당과 율곡이 직접 가꾼 수령 600년의 천연기념물 ‘율곡매’ 가지 한쪽이 고사 되어 간다는 기사를 접하고 조바심이 일었다. 첫돌 지낸 손녀를 데리고 다시 회생하라 응원차 간 것이다. 가까이서 살펴보니 고사 상태가 심하고 홍매도 풍성하지 않아 마음이 아팠다. 율곡 선생이 돌아가시고 20여 년 후에 송시열이라는 석학이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 기호학파의 학맥을 이어 대학자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역대 왕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이름이 올랐다하니 원로대신으로서도 그 영향력을 짐작하게 된다.

속리산 국립공원 안에 화양구곡이라 하여 계곡의 맑은 물과 바위가 어우러진 아홉골짜기 기암괴석이 저마다 경탄을 자아내고 있다. 그 중 제 4곡 금사담을 내려다보며 이웃한 반석 위에 우암이 60세에 지어 제자를 가르치고 자연을 벗삼아 지낸 암서재가 자리하고 있다. 아홉구곡은 읍궁암 능운대 첨성대 등 바위의 형세에 어울리는 저마다의 이름이 놀라운데 제자 권상하 등이 구곡의 이름을 명명하고 스승의 발자취를 기리고 섬기고자 한 흔적이 감동적이다. 선생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하여 위대한 인물이 될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83세까지 장수하여 젊은 제자들 앞에서 늘 강건한 모습을 보였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위대하고 신비로운 인물을 직접 만나볼 수 있다면?

장마철이라서 계곡물이 불어나고 곳곳이 미끄럽지만 남편과 묘소에 가보기로 최종 결정을 하였다.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법주사 갈 때 자주 지나가던 청천 시장 뒤로 들어가니 우암의 종가로 보이는 큰 기와집과 ‘송우암 신도비 및 묘소’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바로 이어 묘소가 보이지 않고 한참이나 돌계단을 지그재그로 몇 차례 오르니 산 정상 부분에 묘소가 나타난다. 어서 오라는 듯 봉분이 매우 커서 또 한번 놀라고 말았다. 허리 굽혀 참배하고 어려운 시국을 도와주십사 기원해 보았다.

본래 수원 무봉산에 있었으나 영조 때 이곳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충북에서 태어나 천하를 이끌다 다시 충북에 오시어 영면하시니 그저 황송하다. ‘흥한 것은 다시 망하고 위태로운 것은 다시 안정을 찾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며, 길흉이란 고정불변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의 노력에 따라 극복할 수 있다’는 우암의 가르침이 새삼 마음에 깃든다. 효종을 도와 북벌정책을 추진하는 등 자주적인 정치를 주도했으며 주자학의 대가로 많은 인재를 양성해낸 그를 사모한 이는 정조임금이다. 정조는 어필로 신도비를 세웠으며 중국에 공자 맹자가 있다면 우리 조선에는 송자(宋子)가 있다 하여 국가적 차원의 성인으로 존숭하였다. 또한 송시열의 저서와 시문, 상소 등을 모아 송자대전을 간행하였으니 우암을 알아본 정조임금께도 머리가 숙여진다.

화양구곡은 충북의 자연환경 명소 10걸로 지정되어 있다. 화양서원, 송자사(宋子祠), 만동묘 등 우암의 유적을 많이 품고 있는데 모진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절개와 아름다움을 지닌 구곡과 생과 사의 이치를 극명하게 보여주며 실천한 우암의 인격이 청풍명월에 높게 촛불처럼 빛나고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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