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혜영교수

1897년 초연된 에드몽 로르탕의 '시라노'는 17세기 프랑스 시인이자 검객, 극작가이자 음악가, 철학자 시라노 드 베르즈락의 삶을 소재로 한 극작품이다.
시라노는 사촌 누이 록산느를 사랑하지만 모자걸이처럼 긴 자기 코 때문에 감히 고백도 못하는데, 그녀에게서 그의 친위부대 신참인 미남 크리스티앙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듣게 된다. 크리스티앙도 그녀를 사랑하지만 말주변이 전혀 없어 고민하자 시라노가 대신 편지를 써주기로 한다.
한번은 직접 말로 고백을 들으려는 록산느를 위해 시라노는 밤에 숨어 그녀를 발코니로 불러내고 담 아래서 크리스티앙에게 사랑의 시를 불러준다. 급기야 그는 몸을 숨기고 직접 사랑의 시로 록산느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는 크리스티앙을 담 위로 올려 보내주고 자기는 뒤돌아선다. 곧이어 전쟁이 터지자, 시라노는 전쟁터에서도 하루에 두 번씩이나 위험을 무릅쓰고 편지를 그녀에게 보낸다.
감동한 록산느는 직접 전쟁터에 찾아오게 되고, 그녀가 편지 때문에 온 것을 안 크리스티앙은 시라노에게 진실을 밝혀 그녀가 사랑을 선택하도록 하라며 최전방으로 나간다.
시라노가 사실을 고백하려는 순간 그녀는 부상을 당한 크리스티앙에게 달려가 버린다. 록산느를 부르며 죽어가는 크리스티앙에게 시라노는 다 고백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다!'라고 말해주고, 크리스티앙은 눈을 감는다.
그 후 15년이 지나도록 록산느는 크리스티앙의 옷에서 꺼낸 피와 눈물이 묻은 편지를 간직한 채 수녀원에서 지내고, 시라노는 토요일이면 그녀를 찾아와 말벗이 돼주는데 어느 토요일 적의 간계로 머리를 다쳐 죽어가면서도 그녀를 찾아와 그 편지를 보여 달라고 한다. 그가 어둠이 내리는 줄도 모르고 편지를 보지도 않고 읽어가자 록산느는 비로소 그녀가 받은 모든 시와 편지가 그의 것을 알게 된다.
만약 시라노가 예전에 사실을 고백했다면, 그녀는 시라노의 마음과 크리스티앙의 외모 중 어느 것을 선택했을까? 편지의 눈물이 오라버니의 것이라는 그녀의 말에 시라노가 그 피는 크리스티앙의 것이라고 한 것처럼, 영혼이 피 흘린 눈물과 생명과 바꾼 피, 과연 어느 것이 더 진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편지에서 눈물과 피를 떼어낼 수 없듯이, 영혼과 몸이 서로의 그림자 되어 하나의 사랑에 깃든다.
여기서 시라노의 삶은 '남에게 마음의 양식을 주고 - 자신은 망각 속에' 파묻히는 존재로 요약된다. 자기 작품의 명예는 표절해간 몰리에르가 누리고, 그가 매혹시킨 록산느는 크리스티앙이 차지했다.
그러고도 그가 죽음 앞에서 원망 없이 '크리스티앙은 미남이요, 몰리에르는 천재다'고 시인하며 '순수한 사랑의 순교자'가 될 수 있었던 비밀은 그가 숨을 거두면서, 모든 것을 빼앗겨도 흠집 하나 없이 하나님 품으로 가져갈 것이라 했던 '나의 깃털mon panache'에 있는 듯하다. 항상 모자에 깃털장식을 높이 꽂고 다니던 검객 시라노에게서 깃털은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편견과 위선을 거부한 내면의 용맹이다.
또 영혼의 시인인 그에게서 깃털은 아무리 그에게서 퍼가도 고갈되지 않는 시적 감성이다. 비겁하게 굽히거나 타협하지 않는 기개, 시인의 아름다운 정신은 훼손할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시라노의 깃털이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또 전부다. 그것이라면 그는 남이 표절한 자기 작품 장면에 사람들이 많이 웃었다는 사실만으로 흐뭇해하고, 남의 입술에서도 조금 전까지 자기가 읊던 시에 와 닿는 그녀의 입술의 감촉을 느낄 수 있다.
책장을 덮으며 묻는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결코 상하지 않을 나의 깃털, 그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당신의 깃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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