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살기 좋은 땅

▲ 정지성
문화사랑모임 대표

오는 9월5~ 6일 청주성탈환기념 축제가 펼쳐진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조헌선생, 영규대사, 박춘무 선생 등이 이끈 의병이 왜병을 물리치고 청주읍성을 탈환함으로써 전세를 뒤바꿔 놓은 계기를 만들어냈던 전투였다. 이를 위해 나섰던 백성들의 죽음을 무릅쓴 각오와 헌신이 얼마나 고귀한 것이었던가를 기리고 언제든지 지배층과 지도자들은 이러한 백성들의 노력과 희생의 토대위에서 이 세상이 서고 역사가 이어져 간다는 진리를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청주 역사에 관해 되돌아보면 몇 가지 특징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그 첫 번째가 청주 지역은 지리적으로 사람살기 좋은 땅이라는 점이다. 너른 들판과 물줄기를 갖춰 농사도 크게 잘되고 사람들도 모여살기 좋은 곳이다.

또 두 번째는 정치 문화적으로 요충이었다는 점이다. 신라가 북쪽으로 진출해 올라와 백제를 누른 후 이 곳 청주 땅에 서원소경-서원경을 설치했다. 백제 지역의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 남쪽에는 남원경을 북쪽에는 서원경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경주를 대신한 지역 수도였던 것이다. 후삼국시대 궁예도 청주에 도성을 만들려 하였던 적이 있고 고려 공민왕은 황건적에 밀려 안동까지 피난 갔다 돌아오는 길에 청주에 임시수도를 한 적이 있다. 조선시대 충주와 청주의 이름 앞 자를 따서 충청도가 되었고, 임진왜란과 호란을 겪은 이후에는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충청병영이 해미에서 청주로 이전해 자리 잡았던 것이다 .

이렇듯 유서 깊은 좋은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오늘날 청주의 역사에 대해서 큰 자부심을 지키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685년(신라 신문왕 5년) 서원소경이 된 이래 1500년의 역사, 940년(고려 태조 23년)이래 1070년 동안 줄곧 불리어진 청주 이름에도 불구하고 청주에 관한 역사적 보여주는 상징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이다. 겨우 성안길과 중앙공원에 있는 몇 가지 유적들뿐이다. 2006년 성안길 내 청원군청 옆 모영화관 신축부지의 땅속에서 중요한 유적이 드러났다.

청주읍성 객사 터 유적으로 보여 지던 곳이었고, 발굴유적에 통일신라기 토기와 예상하지 못했던 건물지 등이 드러나 아마 서원경 유적이 아닌가 하는 의미있는 유적 발굴이었다. 그러나 사적 재산에 관한 경제적 이유로 되 덮어버리고 미래를 기약하고 말았다. 성안길 곳곳에 상업건물이 들어서느라 정신이 없다. 그 중 가장 속상한 것은 청원군청 내 청녕각과 중앙공원을 잇는 구역에 모 통신기업이 재건축이라는 구실로 문화재구역 검토도 제대로 받지 않고 건물을 이미 올려놓았다. 이제는 사유재산의 원칙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청주 역사를 소중히 생각하고, 역사의 상징성을 찾으려는 뜻있는 사람들의 노력과는 거꾸로 청주의 역사 상징인 청주읍성을 다시 찾아 복원해 보려는 노력은 더욱 힘들어 지고 있다. 성안길에 우뚝 솟아 있는 용두사지 철당간도 완전한 광장을 이루지 못하고 반쪽의 마당만으로 위안삼아야 하는 것인가. 청주의 역사적 상징에 대한 바람과 기대와는 달리 너무 속이 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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