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7장 가을 이야기

▲ <삽화=류상영>

황인술이 기억을 더듬는 사이에 변쌍출이 잔기침을 하며 나섰다.

"환갑잔치 하는 것 츠름 죽은……"

순배영감은 그 난리를 치던 날 동네 젊은 것들이 죽은 이복만 내우를 등에 업고 춤은 안 추었나? 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죽은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이 울컥 치솟아 올라서였다.

"새삼스럽게 옛날 생각하믄 뭐햐. 다 지나간 일인디 머. 그라고 죄가 있다믄 농사꾼 자식으로 태어 난 것이 죄라믄 죄여."

순배영감의 얼굴에 일순간 그늘이 지는 것을 느낀 변쌍출이 알만하다는 얼굴로 넋두리를 했다.

"지도 생각이 나느만유. 이복만이가 동리사람들을 한 명씩 불러서 시방 부치고 있는 땅을 산다믄 계속 도지를 줄 것이고, 그럴 생각이 읎다믄 당장 내 놓으라고 윽박지르는 통에 지도 닷마지기를 샀잖유. 솔직히 외상이믄 소라도 잡아먹는다는데 외상으로 땅을 주겠다는 데 싫다는 놈이 워디 있겄슈. 해룡이라믄 몰라도 열이믄 열 죄다 고맙습니다. 하고 계약서에 지장을 찍었지 안 찍었겠슈……"

"크음!"

황인술은 변쌍출이 그만 입을 닫으라는 눈짓에 슬그머니 입을 다물고 순배영감을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계속 말을 하다보면 순배영감의 뼈아픈 상처를 건들 것 같았다. 갑자기 말을 그만두려니까 화가 삭혀지지 않아서 어금니를 자근자근 씹으며 멀리 모산으로 들어오는 길을 바라본다.

그런 짓을 하고 살아남기를 바랬다믄, 하느님한테 침 뱉기가 하고 뭐가 다를까.

황인술은 지금도 잠을 자려고 누웠다가 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있었던 농지개혁 때를 생각하면 화가 나서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진다.

이병호의 부친인 이복만이 머슴을 보내서 밤 중에 조용히 만나자는 연락이 온 것은 양력으로 2월 초순이다. 초저녁부터 바깥 날씨가 칼날을 세우고 있어서 사랑방으로 놀러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일찍 잠이 들었던 날이기도 하다. 이복만 집에서 머슴을 살고 있던 박 씨로부터 영감님이 조용히 올라와달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어따! 날 한번 드럽게 춥네 그려."

황인술은 지금은 구장을 보는 덕분에 좀 낳아졌지만 해도 그때는 겨울이면 쌀독에 보리쌀도 간당간당 하던 시절이었다. 먹는 것은 부실하더라도 잠이나 뜨끈뜨끈하게 자야 된다는 생각에 구들장이 달아오르도록 불을 땠었다. 온 몸이 땀에 젖도록 뜨거운 방에서 잠을 자다가 갑자기 찬바람을 쐬니까 이빨이 저절로 딱따구리 소리를 내며 온 몸이 진저리가 치도록 추웠다. 하지만 이복만이 보자는 말에 안 갈 수가 없어서 총총 걸음으로 면장댁의 쪽문을 열고 들어갔다.

"밤은 깊은데 적적하고 해서 불렀네. 막걸리나 한 잔 하게."

이복만은 미리 술상을 준비해 놓았었다. 따끈따끈하게 데운 막걸리를 직접 따라주며 건네는 말이 솜털처럼 부드럽기만 했다.

"저……"

황인술은 아닌 밤중에 예상하지 못한 환대가 고맙기는커녕 불안하기만 했다. 무슨 안 좋은 말을 하려고 이 밤중에 막걸리까지 따라주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추운 날씨에 얼어붙은 입이 꽁꽁 얼어버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아서 무릎을 꿇고 앉아서 끙끙 거렸다.

"어려워 발고 핀히 앉게. 내가 자네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고, 자네도 인제 자네 땅을 가져야 할 때가 온 거 가텨서 불렀네. 그랑께 어려워 말고 어여 탁베기나 한 잔 하게."

"지……지가 붙이고 있는 논을 내 놓으시라 이……이,말씀이신가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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