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7장 가을 이야기

▲ <삽화=류상영>

황인술은 이복만이 하는 말이 도지로 붙이고 있는 논을 내 놓으라는 말로 들렸다. 이복만에게서 도지를 얻어 부치고 있는 논은 다섯 마지기다. 다섯 마지기라도 해 봤자 풍작 일 때 벼를 스물 한섬 반, 평작 일 때는 스무 섬밖에 소출하지 못한다. 그 중에서 평작으로 열 섬은 도조로 받치면 열 섬이 남는다.

그 중에서 토지수득세가 한 섬 반이 나간다. 남은 여덟 섬 반으로 농협조합에서 빌린 농자금 이자며, 비료대에 구장수곡이며 이런 저런 세금을 제하고 나면 겨우 다섯 섬이 남을까 말까다. 평균 사람 한 명이 한 섬을 먹는 것으로 계산하는데 다섯 섬이면 이미 한 섬이 모자란다는 말이 된다. 거기다 자식들 밀린 사친회비에 여기저기서 꾼 돈을 갚고 나면 석 섬이 남을까 말까다. 그 것으로 적어도 다음해 보리 수확 때 까지 먹으라면 한 끼 굶고, 한 끼 건너뛰는 식을 때워도 부족하다. 그마저 부치지 못한다면 여섯 생목숨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파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허! 조선 사람이 조선말을 그릏게 못 알아들으믄 워틱하나. 논을 내 놓으라는 거시 아니네. 자네가 시방 부치고 있는 들베미에 있는 두 마지기 하고, 벌똥골에 있는 시 마지기를 자네한테 넘기겄다 이 말이여."

이복만이 갑자기 목소리를 줄였다. 마당에서는 동지바람이 사납게 울부짖고 있었다. 비봉산에서 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창문을 뚫고 들려왔다. 파랗게 질려 있던 황인술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가 했더니 혼란스럽다는 얼굴로 마른 침을 꿀꺽 삼킨다.

"영감님 말씀은 무슨 뜻인지 알겄슈. 하지만 그 땅을 살라믄 도……돈이라는 거시 있어야……시방 먹고 죽을라고 해도 돈 한 푼 없는데……"

"시방부텀 내가 하는 말을 똑똑히 듣게. 그라고 이 말이 행여 밖으로 새 나갔다가는 이 시간에 내가 한 말은 일절 없던 말로 치겄네. 약속을 지킬 수 있겄능가?"

이복만은 술상을 옆으로 치우고 황인술 앞으로 바짝 당겨 앉았다. 황인술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가 가진 거는 없어서 쌀독은 개벼울지 몰라도 입이 무겁기로 치자믄……"

"그람 자네를 믿고 말을 하겄네. 내가 그 동안 가만히 지켜본 바로는 이 동리서 인술이만큼 자기 몸을 애끼지 않고 노력하는 사람은 읎는 걸로 아네."

"마……말씀만 들어도 고맙습니다."

이복만의 목소리가 작아지자 황인술은 자신도 모르게 이복만을 향하여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되고 말았다. 황인술은 이복만이 무슨 말을 하려는 지는 통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모산에서 자신을 제일 신임한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기쁘지가 않았다. 이복만이 자신을 그렇게 추겨 세울 때는 무언가 엄청난 일을 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다.

"자네도 은제까지나 남의 농사를 질 수는 읎는 노릇. 나도 먹고 살만큼 벌어 놨응께 하는 말인데 말여. 자네가 부치는 들베미 논 두 마지기 하고 벌똥골 논 시 마지기를 자네한테 넘기겄네."

"어……어뜬 일을 시키실라고?"

황인술은 이복만이 논 다섯 마지기를 넘길 때야 당연히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논 다섯 마지기만 있으면 더 이상 겨울을 배고프게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 같다. 무엇보다 그 논은 한 때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논이었다. 이복만이 은밀하게 시키고자 하는 일이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일이라도 아버지가 유언으로 남긴 논을 찾는 길이라면 못 할 것이 없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했다. 어느 사이에 칼날 같은 바람 속을 뚫고 오느라 동태처럼 얼었던 몸이 풀리고, 등에서 진땀이 주르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시킬 것은 읍네. 이 자리에서 땅을 주고받는 다는 계약서 한 장만 작성하만 되니께."

"논을 기냥 주시겠다는 것은 아니잖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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