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마라톤

환호하는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 (서울=연합뉴스)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가 18일 서울 광화문∼잠실 코스에서 열린 2007 서울국제마라톤 겸 제78회 동아마라톤대회에서 막판 기적의 역전 드라마를 펼치며 2시간8분04초의 기록으로 골인한뒤 환호하고 있다. <사진=동아일보>


환희와 좌절, 다시 환희로 거듭난 17년의 대장정.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37.삼성전자)가 서른 일곱의 나이에 제3의 전성기를 열었다.
1970년 10월생인 이봉주는 우리 나이로는 서른 여덟이다. 이제 불혹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봉주가 처음 풀코스 마라톤을 뛴 것은 1990년 10월 제71회 전국체전. 만 스물을 갓 넘긴 새내기 마라토너가 2시간19분15초로 2위를 차지하자 국내 마라톤계가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0년대 한국 마라톤을 주도했던 승부사인 고(故) 정봉수 감독 사단에서 세계적인 철각으로 거듭났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이봉주는 2시간12분39초로 은메달을 목에 건다. 첫 전성기는 금메달 못지않게 화려한 은빛으로 빛났다.
하지만 시련이 찾아왔다. 1999년에 발생한 이른바 코오롱 사태로 팀을 떠나고 한동안 방황해야 했다. 선수 생활의 최대 위기였다.
삼성전자 육상단에 새롭게 둥지를 튼 이봉주는 2001년 도쿄마라톤에서 2시간7분20초로 한국기록을 세우며 부활을 알렸다. 하지만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선 레이스 도중 넘어지는 불운 속에 24위에 그쳤다.
가장 극적인 순간은 2001년 4월17일 제105회 보스턴마라톤.
서윤복, 함기용 옹의 발자취를 더듬어 반세기 만에 세계 최고 권위의 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한 그는 귀국 직후 카 퍼레이드를 펼치며 올림픽 우승자 못지않은 영웅으로 떠올랐다.
두 번째 전성기를 보낸 이봉주는 또 시련에 휩싸였다.
2001년 에드먼턴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는 생애 처음으로 레이스 도중 타월을 던졌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봉봉남매 함봉실과 남북 동반 우승을 해냈지만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는 14위로 또 좌절했다.
주변에선 슬슬 은퇴 얘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구력과 더불어 스피드를 중시하는 추세로 바뀐 세계 마라톤의 흐름을 더 이상 쫓아가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육상계에서는 하루 빨리 포스트 이봉주 세대를 이끌 차세대 주자를 발굴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포스트 이봉주는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다.
이봉주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후배들이 뒤를 받쳐주지 못하는 현실에서 그냥 포기할 수도 없었다.
좀처럼 2시간10분 안에 진입하지 못했고 발바닥 부상도 생겼지만 특유의 성실성으로 하루 30㎞에 달하는 거리 훈련을 피하는 법이 없었다.
한국 육상은 2000년대 이후 참담한 실패를 맛봐야 했다. 특히 최근에는 하위권으로 곤두박질치며 쓰라림을 맛봤다.
2005년 헬싱키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50위권 밖으로 밀려났고 지난 해 도하아시안게임에서도 메달권은 커녕 완주에 급급했다.
이봉주가 다시 레이스에 나설 수밖에 없는 한국 마라톤의 현실은 그에게 오기를 발동케했다.
이날까지 생애 37번째 풀코스 도전에 35번째 완주.
37세의 나이에 2시간8분대 기록을 세운 것도 세계 마라톤계를 놀라게 할만한 일이다.
40대까지 선수 생활을 하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세계적으로 서른 번 이상 풀코스를 완주하며 끊임없이 정상급 기록을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봉주는 벌써 다음 레이스를 준비하고 있다.
오인환 삼성전자 마라톤 감독은 "나이가 있으니까 충분히 휴식을 취하게 한 다음 가을 레이스를 준비해야 겠다"고 말했다.
오 감독은 "오늘 레이스에서 봤듯이 아직 전혀 문제가 없다. 이미 일정 궤도에 오른 선수인 만큼 훈련의 강도를 조절하면서 양을 늘려나간다면 충분히 더 뛸 수 있다"고 했다.
주변에서 한물갔다는 평을 들어도 그게 다 관심이라고 여기며 담담히 받아들인다는 이봉주.
마라토너로서 환갑을 넘은 나이에도 국내 마라톤의 지존을 지키는 비결은 거의 도에 다다른듯한 마음의 여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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