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년 만에 아시아 축구 정상에 도전하는 한국이 난적 이란을 극적으로 물리치고 아시안컵축구 4강에 진출했다.



태극호의 수문장 이운재가 2002년 한일월드컵축구 8강전을 연상케 하는 신들린 선방으로 베어벡호의 4강행을 이끌었다.



핌 베어벡 감독이 이끄는 축구대표팀은 22일 오후(이하 한국시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부킷 잘릴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대회 8강전에서 전.후반과 연장 120분 혈투를 득점없이 비긴 채로 마친 뒤 승부차기에서 이운재의 빛나는 선방에 힘입어 4-2으로 이겨 준결승에 올랐다.



한국은 25일 오후 7시20분 같은 장소에서 이라크와 결승 진출을 다툰다. 2000년 레바논 대회 이후 7년 만에 4강 티켓을 손에 넣었다.



한국은 1996년 아시안컵 8강에서 이란에 당한 2-6 참패와 2004년 중국 대회에서 3-4로 진 빚을 깨끗이 되갚았다.



조별리그에서 치욕의 탈락 위기를 맞으며 극도로 부진한 성적을 올렸던 베어벡호는 지난 달 29일 평가전에서 3-0으로 이긴 적이 있는 이라크를 4강 상대로 맞게 돼 결승 진출을 충분히 바라볼만 하다.



경질 위기까지 몰렸던 베어벡 감독을 한숨을 돌리며 우승을 향한 전열을 정비할 수 있게 됐다.



이운재가 영웅이었다.



한일월드컵 8강에서 '무적함대' 스페인을 격침할 때 온몸을 던져 승부차기 선방을 펼쳤던 그가 5년 만에 다시 날았다.



한국의 선축으로 시작한 승부차기에서 이운재는 이라크 2, 4번 키커 메디 마다비키아와 라술 하티비의 킥을 막았다.



마지막 키커 김정우가 반대쪽으로 킥을 꽂아넣는 순간 어깨를 걸고 있던 태극전사들은 장대비에 젖은 그라운드에 미끄러지며 포효했다.



5천여 말레이시아 교민 응원단도 한없이 환호성을 올렸다.



경기는 120분 내내 가슴을 졸여야 하는 접전으로 전개됐다.



베어벡 감독은 '이란 킬러' 이동국을 중앙 원톱에 놓고 염기훈과 이천수를 좌우 날개로 펼쳤다.



중원에선 김정우가 플레이메이커를 맡고 김상식, 손대호가 뒤를 받쳤다.



포백 진용은 김진규, 강민수가 중앙에서 호흡을 맞추고 김치우, 오범석이 좌우 오버래핑을 노렸다. 골문은 이운재가 지켰다.



이란은 조별리그와 달리 스리백을 썼다.



바히드 하셰미안, 하티비가 투톱으로 나왔고 알리 카리미가 공격을 조율했다. 오른쪽 마다비키아는 측면을 넘봤다.



초반엔 탐색전이 길었다.



전반 15분부터 장대비가 쏟아지면서 미끄러워진 그라운드에서 두 팀 다 살얼음판을 걸었다.



미드필드 압박이 심해 좀처럼 슈팅 기회를 잡지 못했다.



전반 중반까지 한국의 찬스가 많았지만 종료 직전엔 아찔한 위기를 맞았다.



전반 6분 이천수가 아크 뒤 프리킥으로 골문을 겨냥했지만 크로스바를 훌쩍 넘었다.



이란은 날카로운 스루패스를 찔러 넣었지만 번번이 오프사이드에 걸렸고 태극전사들이 사력을 다한 태클로 패스 공급로를 차단했다.



잠잠하던 전반 24분 김상식이 기습 중거리슛으로 때린 볼이 파고들던 이천수의 왼발에 걸려 논스톱 슛처럼 골문 구석으로 향했다. 이란 수문장 하산 루드바리안이 몸을 던져 막아냈다.



전반 막판 이란이 거센 공세를 폈다. 42분 수비진 호흡이 맞지 않아 문전 공간을 내줬고 카리미가 쇄도했다. 이운재의 육탄방어로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45분 마다비키아에게 중거리슛을 내줬다. 이번엔 김진규가 기막힌 슬라이딩으로 골문으로 향하던 볼을 쳐냈다.



후반에도 조마조마한 공방이 이어졌다. 이동국 대신 조재진이 들어갔다.



후반 15분 염기훈의 왼발 슛이 안타까운 탄성을 자아냈다.



이천수의 크로스를 받아 때린 슈팅이 비에 젖은 그라운드에 두 번 튀겨 골문으로 빨려들 듯 했지만 골키퍼가 쳐냈다.



18분 이천수의 프리킥은 또 크로스바를 넘어갔다. 염기훈 대신 투입된 최성국은 후반 막판 세 차례 프리킥을 올렸지만 조금씩 짧아 수비진에 걸렸다.



후반 23분 패스 실수로 잘린 위기에서 이운재가 골문을 비워 위태로웠지만 오범석이 경고 한 장을 받으면서 태클로 저지했다.



90분 혈투를 끝내고 맞은 연장.



30분 간 숨막히는 접전만 계속됐다. 최성국의 코너킥은 골문 앞을 예리하게 통과했지만 해결할 공격수가 없었다.



이란의 네쿠남과 마다비키아가 연달아 중거리슛을 때렸다. 골 포스트를 살짝 빗겨가고 이운재가 선방했다.



태극호는 체력이 떨어진 이란을 밀어붙였지만 끝내 골문을 열지 못했다.



120분 사투를 끝내고 맞은 '피말리는 룰렛 게임' 승부차기.



선축을 한 한국은 1번 키커 이천수가 중앙으로 강하게 킥을 꽂았다. 승부차기 전문으로 막판에 들어온 190㎝의 장신 골키퍼 바히드 탈레블로는 방향을 잡지 못했다.



이란 1번 키커 페리돈 잔디도 킥을 성공했고 한국 2번 김상식도 침착하게 네트를 흔들었다.



이란 2번은 주장 마다비키아. 이운재는 움찔하며 방향을 예측한 뒤 번개같은 다이빙으로 킥을 막았다.



그러나 3번 키커 김두현의 킥이 골키퍼 발에 걸렸다.



4번 조재진까지 성공하고 3-2에서 4번 키커를 맞은 이운재. 하티비의 킥은 넘어지면서 집중력을 잃지 않은 이운재의 발에 걸렸다.



그리고 김정우의 마지막 킥이 꽂혔다. 지긋지긋한 이란 징크스를 날리고 아시아 정상을 향해 달려가는 축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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