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만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한용운님의 시를 읊으며 오래된 사랑을 꿈꾼다. 젊은이의 격정적인 사랑보다 기력이 쇠잔한 노부부가 서로를 마주보며 따스하게 품어주는 사랑이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인식된다. 그윽하고 조용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사랑을 동경했다.

친정어머니는 20여 년 전에 아버지와 사별했다. 사업실패로 지병을 얻어 모든 것을 다 잃고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칠남매에게 달려 붙은 불을 끄는 심정으로 살아냈다던 우리 어머니. 남편 없는 종가의 맏며느리 노릇보다 더 힘든 것은 친척들이 제삿날에 모이면 유난히 어머니의 몸태를 살피고 온갖 억측으로 눈물을 흘리게 했던 일이다. 아버지도 안계신데 어머니가 곱게 화장을 하면 친척들의 얘기가 생각나 나도 불안한 마음이 되었다. 어머니는 그저 어머니일 뿐, 어머니는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칠남매 젖을 물린 보잘 것 없는 가슴에 브래지어도 하지 않고 떨어진 내복을 입고 그냥 분주한 사람이 어머니라고 생각했다. 부뚜막 숟가락 통에 늘 꽂혀있는 달챙이 숟가락처럼 번듯한 밥상에 한번 오르지 못하고 언제나 허드렛일로 몫을 다하는 어머니의 삶은 곤곤했다. 그리고 그 고단한 어머니의 삶 덕분에 나는 맏이 이면서도 동생들을 돌보아야하는 노역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제 노인이 되었다. 돌아보니 지금의 내 나이에 어머니가 혼자되신 것이다. 거울 속의 나를 본다. 충분히 사랑스러운 여인의 모습이다. 어머니도 그러하셨을 것이다. 내 어머니이니까. 아버지와 사별했을 때 어머니에게는 더 이상 성욕구가 없을 것이라고 믿어왔다. 가슴 설레는 삶도 다 지나갔을 나이라고 생각했다. 낮에 어린 칠남매를 돌보고 전쟁 같은 삶 속에서 혼자 얼마나 외로웠을지 생각해 보지 못했다. 이십 여 년이 지난 지금도 수영이나 게이트볼 하시는 모습을 보면 중년여인처럼 활기가 있으신데 말이다. 나는 얼마나 이기적인 딸이었던가.

노인 성 전문 강사 교육을 받으며 내내 어머니를 떠올렸다.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안정되어 있다면 성에 대한 욕구와 관심사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 이라고 한다. 문지방 넘을 힘만 있어도 자식을 얻을 수 있고, 밥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여자를 품고 싶어 한다는 옛말이 생각난다. 흔히 나이가 들면 성기능이 사라지고 성에대한 관심도 줄어든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편견이며 실제 가장오래 유지되는 능력중의 하나가 성기능이라고 한다. 젊은이가 옆구리가 시리다면 이성 친구를 사귀라하고 노인이 등이 시리다면 보일러 놓아 드려야겠다고 한다. '죽어도 좋아' 라는 영화를 보며 노인' 라에 정년이 없음을 실감했다. 엄마에게 넌지시 남자친구 사귀라고 말해보았다. 아직도 목소리가 앳된 엄마가 눈을 흘긴다. 감추고 숨길 라이 아니다. 고령화 사회에서의 성 고독감은 심각한 문제이다. 배우자를 잃고 혼자 살아가야 하는 기간이 너무 길어 졌다. 홀시어머니, 홀시아버지가 대체로 까다롭다고 하는데 억압된 성적욕구에서 기인한 일반적인 심리상태라고도 한다. 이야기할 상대, 따스하게 손을 잡아줄 사람, 자신의 수고를 인정해주고 지지해 줄 연인, 그리고 가슴을 맞대고 귓속말 할 수 있는 사람이 노인에게도 똑같이 필요하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신체의 능력, 성을 말한다. 오늘 아름다운 것은 내일도 아름다운 것이라고. 서로의 홍안을 사랑했던 만큼 백발도 여전히 사랑스러운 것이라고.

▲ 유인순
천안수필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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