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부, 위구르족 향비의 향기

▲ 1. 카스에 있는 향비의 가족묘소 2. 향비묘 무덤안의 모습 3. 향비의 초상화는 장군복장? 4. 향비묘에 있는 향비 모델도 위구르족의 장군복? 5. 향비가족묘 옆에 있는 일반인들의 무덤 6. 야스타크 청진사 모습 7. 야스타크 청진사 정문 벽돌에 남은 위구르 여인네들의 손자국
파미르고원에서 실크로드의 서쪽길을 따라 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며 고선지 장군과 지현옥 산악인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카스에 도착 시가지에 있는 유적들을 찾아보고 있다. 카슈갈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약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구르족의 상징 향비의 묘가 있어 차를 몰아 길을 나선다.
비련의 여인 향비(香妃)는 카슈가르 출신의 위구르족 여인으로 1757년 청나라 건릉제(乾隆帝)의 제3비가 된 절세미인이었다고 한다. 이 여인의 몸에서 향기가 감돈다고 해서 '향비'라고 불렸다고 하는데 특별한 향기가 몸을 감싸고 있는 여인으로 알려져 있어 그 향기가 어떤 향기를 말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현재 카스지역에서 향비는 위구르족의 자존심을 상징하고 일깨우는 여인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그 연유에는 위구르족들의 강한 민족적 독립의 열망이 담아 있는 것 같다.
이야기에 의하면 청나라 건릉황제(청나라 6대 황제· 60년간 재위)가 향비를 비로 삼고 잠자리를 요구하자 향비가 거절하고 고향을 그리워하기만 하자 이것이 못마땅한 황태후가 황제의 지방순시를 하는 사이 환관을 시켜 목을 졸라 죽였다고 한다. 당시 향비에게는 고향에 정혼자가 있었다고 한다.
위구르족들에게는 자존심을 세운 비련의 여인으로 그리고 있으나 한족 출신 현지 가이드의 설명은 자금성에서 건릉제의 사랑을 받으며 위구르족 생활방식으로 58세까지 살았다 한다. 향비와 관련된 확인되지 않는 여러 가지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있으며 향비묘도 확실하지 않다는 말도 있다. 다만 고향을 떠나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비련의 소수민족 여인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향비묘는 1640년 이 지역 세력가였던 아파 호자(和卓)가 만든 이슬람식 능묘로 위구르족들은 향비묘라고 부르고 있으나 정확하게 한다면 향비 가족들의 묘가 된다. 실제 호자 일족 5대 72명의 시신이 이곳에 묻혀있다. 녹색 타일로 벽을 장식한 능묘 안 오른쪽 구석에 작아 보이는 향비의 묘도 안치되어 있고 능묘에 들어서며 정면에 보이는 큰 무덤이 향비 아버지의 묘라고 한다. 향비가 북경에서 죽자 향비의 유체를 운송할 때 사용한 수레가 이곳 무덤안에 보존돼 있다.
향비묘 앞에서 향비의 초상화를 보고, 향비 복장을 한 위구르족 모델아가씨를 보니 장군복장의 모습을 하고 있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고 위구르족 민속의상을 입은 향비를 그리다가 망가진 느낌이 든다.
향비묘 실내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돼 있고 밖에서 사진을 찍으니 오른쪽 맨 구석에 있는 향비의 작은 묘는 잡히지 않고 앞에 있는 붉은색의 향비 아버지묘만 찍힌다. 이건물의 오른쪽으로 크고 작은 많은 무덤 군이 놓여 있고 서쪽에는 카스에서 오래 된 사원인 야스타크(亞斯達克)청진사가 있으며 그 앞으로 예배실이 있다.
향비의 가족묘를 보니 야르칸드에서 본 사차국의 아마니싸한 왕비묘와 비교가 된다. 향비묘는 가족묘에 묻힌 것이나 아마니싸한은 개인 묘에 화려하기까지 해 보이는 반면 위구르족들은 향비를 민족의 자존심으로 내세우고 있는 특징이 있다.
향비의 몸에서 풍긴 향기가 어떤 향기였을까 생각하며 중국의 역사에서 비운의 세 여인을 선정해 보니 왕소군, 문성공주, 향비 이 세 여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왕소군(王昭君)은 전한시대 원제의 후궁으로 흉노(기원전 4~1세기 몽고 지방에서 세력을 떨친 유목민, 기원전 2세기 서역의 실크로드 통상로를 확보, 후한에 밀려 남북으로 분열)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보내지는 비운의 여인으로 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중국문학에 많은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왕소군은 양가집의 딸로 후궁이 됐으나 당시 흉노의 침입으로 어려움이 있자 한나라가 우호 수단으로 bc 33년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을 보내 아들 하나를 낳았다 한다. 호한야 선우가 죽자 흉노의 풍습에 따라 호안야 본처의 아들인 복주루 선우(復株累單于)에게 재가해 딸을 두 명 낳았다 한다. 왕소군의 이야기는 흐르는 세월에 덧붙여지고 각색이 돼 이민족의 화친정책에 희생이 되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남아 있으나 그 사실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왕소군이 궁중의 화공에게 잘 보이지 않아 그녀의 얼굴을 못생기게 그려 황제에게 보여줘 흉노에게 시집을 가게 됐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와 왕소군이 남긴 글귀 하나가 그녀의 서럽도록 슬픈 심정을 보여주고 있다.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은 왔는데 봄 같지 않구나."
중국의 역사에서 한족의 이민족 우호정책으로 많은 여인들이 다른 민족에게 시집을 가게 되는데 불운했던 일도 있었으나 긍정적인 면도 많았던 것 같다. 왕소군과 함께 한나라의 여인으로 실크로드를 개척한 황제 한무제의 누이가 흉노의 대선우에게 시집을 가며 고난의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두번째는 문성공주(文成公主·625~680)를 들수 있는데 티벳(토번)의 강력한 통치력을 지닌 송찬간포왕에게 시집을 간 당나라 황실의 공주로 누구의 딸인지 분명하지는 않다고 한다. 티벳을 통일한 송찬간포왕의 위협에 당태종이 정략적인 혼인을 제안, 641년 일월산을 넘어 티벳으로 시집을 간 한족 여인으로 지금은 추앙과 존경을 받고 있다. 이때 당태종은 티벳과 평화조약을 맺고 645년 고구려를 침공한다. 문성공주가 라싸의 포탈라궁에 살면서 당의 선진문명을 티벳에 전해 농기구제조, 방직, 주조 ,제지술 등 티벳의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고 티벳 불교가 번성하도록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청나라 때 위구르족 여인 향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 한민족의 여인들 중 절개를 지키며 고난한 삶을 살아간 여인은 누가 있을까. 임진왜란 때 왜장을 품에 않고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가 떠오르고 청주 충렬사에 모신 동래부사 천곡 송상현의 처는 임진왜란 때 일본까지 끌려갔지만 왜왕에게 굴복하지 않고 되돌아와 열녀로 추앙받고 있는 열녀 이씨가 될 것 같다. 많은 왜침에 굴절된 삶을 살아온 우리역사 속에도 절개를 지킨 열녀들이 많이 있다.
향비묘를 나와 위구르족들의 정신적인 중심이 되고 있는 야스타크 이슬람사원을 찾아본다.
청진사에서 매일 몇 차례씩 진행하는 이슬람 예배에는 남자들만 참여하는 금녀의 장소이다.
여자들은 죽어서나 잠시 사원에 들어왔다가 나가는 형식의 장례를 치른다고 한다. 종교에서도 이곳은 남녀차별이 있는 것 같다. 이슬람 여인들이 쓰고 다니는 차도르(페르시아어·여자들이 얼굴을 안보이게 하려고 쓰는 보자기)만 보아도 여성들에게는 가혹한 종교가 아닌가 싶다.
야스타그 청진사 정문 기둥에 손자국이 깊게 파여 손때가 묻은 상태로 남아있는데 이것은 오랜 세월 여성들이 청진사 문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사원 안을 바라보며 기둥을 손톱으로 긁은 흔적이라고 하니 그네들의 쓰라린 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여성들에게 가혹해 보이는 것만 같은 이슬람교는 위구르족의 정신적인 지주이며 삶 그 자체인 것 같다.
향비묘를 나오며 따라오는 의문점 하나 향비의 몸에서는 어떤 향기가 났을까. 몹시 궁금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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