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아름다움

또 다시 해가 떠올랐다. 매양 떠오른 해이건만, 새해 아침 맞이는 특별하다. 일출을 맞으며 저마다 희망과 바람을 갖는다.

생각해 보면 이 세상 어느 곳인들 해가 뜨지 않는 곳이 어디 있으랴. 섬에 사는 이들은 바다에서, 두메산골에서 사는 이들은 가파른 산협에서, 들녘에서 사는 이들은 아득한 지평선에서 새로운 한해를 맞는다. 그래 한 해가 가고 오는 날은 일출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추위에도 불구하고 해맞이를 하곤 한다. 그들은 아마도 새해 아침에 나름대로의 의미를 붙여 각자의 소망을 띄워 올렸으리라. 그래 태양은 예나 지금이나 추호도 변함이 없으련만, 나이 들면서 바라보는 느낌은 사뭇 다른 것 같다.

꽃의 아름다움

얼마 전 많은 직원들이 인사 발령되어 새로운 임지로 부임하였다. 사람이 오기도 전에 소식을 타고 먼저 전해오는 건 언제나 형형색색의 축하 화환이나 꽃바구니이다. 사무실 중앙 탁자에 놓인 커다란 꽃바구니 덕에 실내 분위기가 그윽해졌다. 꽃을 좋아하고 꽃꽂이에 관심이 많아 사무실에 놓여 있는 분재나 꽃들을 보며 남다른 생각에 잠기곤 한다.

꽃바구니의 오아시스 안에 갇혀 있는 꽃을 보면 가련해 보인다. 몸뚱이는 잘리고 목은 좁은 오아시스에 조여 도무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꽃은 가족을 잃어버리고 아름다움을 즐기려는 인간의 탐욕스러운 손길에 이끌려 여기까지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꽃의 생명을 연장하려고 꽃의 얼굴에 물을 뿌려주지만 이내 꽃이 흘리는 눈물처럼 보인다.

바구니에 꽃을 가두어 놓고 시각적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따지고 보면 탐욕의 손을 뻗치는 격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어미의 젖을 먹고 자라듯 꽃도 생명이 있어 뿌리로부터 수액을 빨아들이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런 꽃의 여린 살갗에 가위를 대어 곁에 두고 홀로 즐기려함이 아닌가. 그래 화병으로 옮겨 온 꽃을 보면 마음이 그리 평온하지 않다.

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인은 '저만치 혼자서' 라고 읊었다. 그래 제 자리에 있을 때 비로소 꽃은 아름답다. 저만치 있는 꽃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자연 속에 있는 진정한 꽃이며, 우리의 눈에 고독하지만 사뭇 겸손하게 다가오지 않는가. 하여 화병에 꽂인 꽃이야말로 저만치의 거리감을 상실하고 우리에게 가까이 온 꽃이다. 나는 들에서 이슬을 먹고 바람에 흔들리는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는 꽃을 좋아한다. 산과 잡초와 벌레와 더불어 있는 꽃이기에.

일류만 사는 사회 아니다

꽃만이 아닐 것이다. 사람도 '저만치 혼자서' 있는 사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싶다.

요즘 우리 사회는 출세해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존경 받고 영원한 추앙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일류만 사는 사회는 아니다. '저만치 혼자서' 궂은 일을 하면서 묵묵히 사는 사람들이 더 많다.

머잖아 지역의 일꾼을 뽑는 선거 열풍을 보게 되리라. 그네들은 지역민을 위해서 존재하는 일꾼이다. 자신을 뽐내는 사람보다 저만치 혼자서 자랑하지 않고 남을 아름답게 꾸미는 자리에 묵묵히 서 있는 사람이 진정한 일꾼이리라.

매스컴에는 언제나 출세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마치 그 사람들만이 이 사회를 올곧게 지켜 가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음지에서 묵묵히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가. 햇빛이 필요한 곳은 어쩌면 양지보다는 음지이리라.

화병에 꽃보다 들에 핀 한 송이 꽃을 좋아하듯 상을 타고 출세한 사람보다 일생을 행상을 해서 번 돈을 죽음을 앞두고 장학기금으로 기증한 할머니가 더욱 존경스럽다.

어둠이 짙게 드리운 밤거리를 밝히고 있는 가로등도, 그 아래에서 새벽길을 청소하는 청소부들도 문득 들꽃만 같아 보인다.

▲ 김정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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