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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
김정렬  |  news@ccdail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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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0.02.09  17:5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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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나니 눈발이 날린다. 눈 내리는 길을 무작정하고 걷고 싶다. 목도리를 머리까지 푹 눌러쓰고 집을 나선다.

제법 하얗게 쌓인 눈길이 미끄럽다. 가로등 불빛에 눈이 마구 휘날린다. 얼굴이며 몸이 눈으로 뒤덮는다. 목도리를 얼굴에 감아 얼굴에 나부끼는 눈을 피하지만, 눈발이 뺨을 때린다.

문득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가 어렴풋 들려오는 듯 하다. 시골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던 유년시절의 눈 내리던 날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이라도 달려가면 시골집 사랑방에서는 어머니가 불이 꺼지려는 질화로에 연방 삼발이를 올려가며 오지뚝배기에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끓여 놓고, 지나가는 발소리마다 귀를 나발통처럼 열어 놓고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따뜻한 정이 무르익던 날. 그렇게 어머니는 우리의 얼어붙은 마음을 훈훈히 녹여 주셨다. 그래 우리들의 겨울밤은 추운 줄을 몰랐다.

어디 우리들에게만 눈 내리는 밤이 좋았던가. 사냥꾼들은 사냥을 갈 수 있어 눈을 기다렸다. 농사꾼들은 보리를 위해 함박눈이 내리길 고대했다.

초가집 처마에 팔뚝만한 고드름이 달리면 펄쩍 깨금발로 뛰어 따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행여 고드름 안에 지푸라기 한 줄이 박혀 있어도 그 안엔 따스한 정이 담겨 있어 마냥 좋기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정서를 어디서고 찾을 수가 없다.

뒤뜰에 놓인 열댓 개의 장독대엔홍시가 가득 들어 있는 장독대도 있었다. 그것을 찾아내는 즐거움도 또 어떠했던가. 삭풍이 몰아치는 한겨울에 장작불을 잔뜩 지핀 아랫목은 설설 끓었다. 그때 대접에 얼음이 서걱서걱한 홍시를 담아 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얼마 전 감을 사다가 냉동실에 얼렸다가 녹여서 홍시를 만들어 먹은 일이 있었지만 이빨만 시릴 뿐 더욱더 어머니의 생각만 간절했다.

겨울날씨라지만 그때의 추위에 비긴다면 지금은 추위라 할 수도 없다. 학교에 오고 갈 때면 정말 발가락이 빠지는 듯했다. 길을 가면서 얘기를 하면 입에서 나오는 입김으로 목에 감은 목도리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장작바리를 싣고 들어오는 소의 입에서도 여물을 끓이는 가마에서처럼 무럭무럭 김이 났다. 소의 턱주가리에는 으레 얼음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춥다춥다 해도 근래에 와서는 한결 덜 추워진 것만 같다. 인총이 많아진 탓인가. 난방장치들이 전에 비해 잘 되어 있는 까닭인가. 이유야 어디 있든 예전부터 지금의 겨울은 한결 따뜻하다.

창밖에 눈이 날리는 걸 보면 그냥 마음이 흐뭇해지고, 방안에서도 눈이 조용히 내려 쌓이는 소리를 들으면 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눈 내리는 날 밤만큼은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마치 오래된 친구의 방문을 받듯 나는 그가 오면 반갑다. 친구도 오다가다 마음을 상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눈은 언제나 포근한 친구의 마음 그대로여서 좋다.

좋은 친구를 만났을 때 무작정 좋듯 눈 내리는 밤이면 이유 없이 좋기만 하다. 하여 내게는 겨울이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내게 있어 겨울은 오월 첫여름 못지않다.

눈은 이 땅위에 흩어진 모든 보기 싫은 것들, 추한 물건들을 덮어서 우리의 시야를 아름답게 해 줄 뿐만 아니라, 마음속의 어지럽고 미운 것들까지도 곱게 덮어 준다. 실로 나는 눈이 오는 날엔 누구에게나 천사가 되고 싶다.

섣달그믐도 가까운 겨울밤이 깊어가고 있다. 머리에 눈을 허옇게 쓴 채 고단한 나그네처럼 나는 조용한 내 집 초인종은 누른다. 눈이 내리는 성스러운 밤을 위해 모든 것은 깨끗하고 조용하다. 꽃 한 송이 없는 방안에 내가 그림자 같이 들어옴이 상장(喪章)처럼 슬프다.

창밖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다. 저 적막한 거리거리에 내가 버리고 온 발자국들이 흰눈으로 덮여 없어질 것을 생각하며 나는 가만히 눕는다. 이 밤에 바람소리는 창틀을 깎고 나는 가슴을 깎는다.

▲ 김정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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