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 블랙스톤 리조트에서 택시를 불러 탔다. 낯선 곳에서 혼자 나선 길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렌다. 택시기사에게 내 길을 물었다. 월평포구에서부터 시작하는 제 8코스. 택시에서 내리자 화살표가 시작 되었다. 반대방향 화살표는 노란색. 순방향 화살표는 청색. 리본도 곳곳에 매달려있다. 사방으로 난 길 위에 앙증맞게 그려진 화살표가 나를 안심 시킨다. 비슷한 보폭이련만 더운 입김을 내 뿜으며 나를 지나치는 사람들 뒤를 따라다니다가 그들이 멀어지면 다시 화살표에 집중한다.

잠시 앉아서 바다에 기댄다. 재촉하는 이 없이 혼자서 놀며 쉬며 가는 올레길 산책을 시작한 것이 아무래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최고경영자과정 동문들과의 일박이일 골프 여행이었다. 혼자 걷는 일이 골프의 즐거움을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지난 가을 등산하다가 삐끗한 발목이 아직 수상하기도 하고 대학원 공부를 마치기까지는 시간도 많이 들고 돈도 많이 들어가는 골프를 접기로 결심한 터다. 사람들 틈에서 때때로 자신을 왜곡시키기도 했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어 혼자만의 시간을 선택했다. 혼자 바라보는 풍경은 처음처럼 새로운 경험으로 내 안에 들어온다.

검은 바위에 선명한 화살표를 따라 풍경을 밟아간다. 다시 솔숲으로 길이 나있고 해풍에 굽은 소나무가 정겹다. 호젓한 길속으로 들어가 바다를 향해 생리적 욕구를 해결한다. 지도가 없는 길 위에서 두어 시간을 보낸 듯하다. 언제 화장실이 나올지 모를 일, 오늘 만큼은 내 욕구를 속박하지 않기로 한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쾌감을 느낀다.

숲이거나 밭둑이거나 발바닥에 닿는 흙의 감촉이 절절이 올라온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로지 화살표에 의지해 어디론가 나있는 길을 줄여나가며 걷고 있다는 것이 유쾌하다.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생각이 넘친다. 무엇보다 나에게 이정도의 호사를 누릴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한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다이어리에 적힌 시간에서 자유롭지 못한 일상에서 나만을 느끼며 내게 집중하는 이 시간이 행복하다.

인생 여정에 오랜 동안 길을 가며 길을 물을 시스템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열 살쯤에는 어느 길로 가야하고 스무 살이 되면 어떤 화살표를 따라가야 하는지 알려줄 사람. 쉰이 넘어 이제는 올만큼 왔다고 생각하고 주저앉고 싶을 때 아직도 길은 계속되고 있다고 화살표 하나쯤 그려줄 이 곁에 있다면 좋겠다. 미래에 대한 호기심처럼 굽은 길 저쪽에 나있는 풍경에 마음을 보탠다. 세월이 길처럼 나있다. 안전한 길 못지않게 새로운 길에 대한 애착도 있다. 경험 한다는 것, 그리하여 내 길이 넓어진다는 것 그것 또한 학습이리라.

길을 가다가 비를 만났다. 손바닥에 툭툭 떨어지는 빗방울을 확인하고도 마냥 느긋하게 걸었다. 갈대 잎에 빗방울 듣는 소리가 투닥투닥 정겹다. 어린 시절, 느닷없는 소나기에 토란잎을 뒤집어쓰고 옷이 다 젖도록 들길을 뛰었던 기억이 새롭다. 빗방울이 몸에 박혀 여름에도 입술이 퍼렇게 서늘했던 그 기억이 내게는 못 다한 욕구처럼 그립다. 아무도 보는 이 없으니 이제야 그렇게 한번 비를 맞아 보리라 결심해 본다. 파카 모자를 올려 쓰고 천천히 길을 갔다. 콧잔등에 빗물이 내리꽂힌다. 큭큭큭 웃음이 나온다. '오늘 별짓을 다해 보는구먼!

부르르 진동음에 깜짝 놀랐다. 점심 먹고 나인 홀 더 돌겠다던 계획이 비로인해 취소되었단다. 함께 움직이려고 하니 급히 돌아오라는 메세지에 후다닥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에서 택시를 타야할지, 아직도 밭둑길이 계속되고 있었다. 더운 입김을 내뿜으며 빠르게 길을 걸었다. 비를 피해 모두들 어디로 뛰었는지 아무도 만날 수가 없었다. 낭만처럼 고즈넉하던 길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잠시 꿈에서 깬 듯 다이어리속의 일상으로 뛰어 들어갔다.

▲ 유인순
천안수필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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