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던 백성이 민중으로 우뚝 서다


충청일보는 충청지역의 동학농민혁명사를 새롭게 조명 할 창간 61주년 기념 시리즈 동학농민혁명 현장을 찾아를매주 월요일 12면에 연재합니다. 충청도는 동학 지도부가 공주집회 보은취회 등의 사회운동을 전개한 동학농민 혁명의 중심지였습니다.그러나 충청지역 동학혁명 연구는 체계를 갖추지 못해 충청지역이 동학혁명사의 중심이 아닌 언저리로 남아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에 따라 본지는 충청도 동학농민혁명의 발자취를 따라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발굴하고 올바른 평가를 통해,지역사회의 역사의식을 높이고 충청도의 가치를 재정립하기 위한 시리즈를 마련한 것 입니다. 집필은지난 83년 본지 신춘문예에 소설 ‘꽃마차’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뒤 오랫동안 충청도지역 동학 역사 현장을 답사하며 소설화해 온 채길순 교수(52·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가 맡았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바랍니다.


조선 후기는 백성이 민중으로 잠을 깨어 가는 시기였다. 봉건 지배계층은 임진왜란(1592~1597)과 병자호란(1637-1638) 두 외세의 침략 전쟁에 시달리고 나서도 민생을 팽개친 채 권력쟁탈에만 급급했다. 조선 후기 사회는 이 같은 모순된 체제에 저항하는 민란이 빈번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동학은 민초들의 지배질서에 대한 불만을 총체적으로 결집하여 저항할 수 있는 이념을 제공했다. 당시 지배 계층에 억눌려 있던 민중에게는 가히 혁명적이었으며 구원의 손길과 같은 것이었다. /서찬석 지음 "동학농민운동 가까이"에서 박종관 그림 © 충청일보


특히 홍경래란(1811)에서부터 전국으로 번졌던 임술봉기(1862)에 이르기까지 세도정권에 대한 저항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민란은 그때마다 실패를 거듭했다. 민중은 지도 이념이 없는 민란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한편, 이렇게 안으로 봉건 지배층이 민중세력의 도전에 직면해 있을 때 일본 및 서구 열강의 침략 야욕까지 겹쳐 민중의 삶은 한층 불안하기만 했다. 1860년 영국· 프랑스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어 동양의 문호가 개방됨으로써 한반도의 국경 개방을 더욱 압박해 왔고, 한반도는 세계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게다가 대원군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등장한 민씨 정권은 한층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이었으며, 민중의 내부 개혁 요구에 겁을 먹고 외세를 끌어들여 이를 탄압하기에 이른다. 결국, 청일전쟁(1894)으로 청군과 일본군을 이 땅에 불러들였다.


민족 고유 종교 동학 등장

이 시기에 몰락한 양반출신 지식인 최제우(崔濟愚·1824-1863)가 오랜 천하주유를 거쳐 전통적인 민간신앙에 도교와 불교, 심지어 천주교적 요소까지 흡수하고, 여기에 조선 후기 몇 차례에 걸친 민란의 실패를 통해 얻어진 현실 개혁의 요소를 보태어 민족 고유의 종교 동학을 창도한다. 동학은 몰락한 지식층이나 정권으로부터 소외된 중인, 서얼 계층이 참여하게 됨으로써 그 사상을 더욱 체계화 시킬 수 있었다.

즉, 동학은 민초들의 지배질서에 대한 불만을 총체적으로 결집하여 그에 저항할 수 있는 이념을 제공함으로써 민중 운동에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 것이다.

예컨대 당시 지배계층에 억눌려 있던 민중에게 동학의 종지(宗旨)인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평등사상은 가히 혁명적이고, 구원의 손길과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경상도 경주에서 출발한 동학이 강원 충청 전라 경기도 지방으로 들불처럼 번져가면서 차츰 교조 신원운동과 부패한 봉건 정권, 외세 침략에 대한 경계를 내세운 사회운동으로 자연스럽게 성장하면서 민족 저항 운동의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이다.


충청도는 동학혁명의 중심지

1864년 3월, 창도주 최제우가 혹세무민의 죄로 대구에서 처형되자, 도통을 이어받은 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1827-1898)은 관에 쫓겨 강원도 산악지역에 은거하게 된다.최시형은 감시를 피해 소백산맥을 넘나드는 잠행 포덕(潛行布德)으로 충청도 지역에는 일찌감치 동학이 유입되었다.최시형은 충북 지역을 교두보로 경기 충남 전라 지역으로 교세를 확장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충청 지방은 동학이 유입되고 확장되어가는 통로였다. 또한 충청도는 동학 지도부가 공주집회 삼례집회(1892), 광화문복합상소 보은취회(1893)와 같은 사회운동을 전개해 나가면서 명실상부한 동학혁명의 중심지가 된다.

▲동학운동 초기 지역분포 © 충청일보
1894년, 전라도에서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 교단의 지도부는 전개과정을 주시하면서 긴박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그해 9월 18일, 마침내 최시형이 2차 봉기를 선언하자 동학 교도들은 충청 강원 경상 각지에서 기포하여 보은 장내리에 집결한다.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군은 논산으로 이동하고, 10월 16일 경 전라도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군과 합류한다. 이로써 명실상부한 동학연합군이 형성된다. 동학연합군은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인 공주 성을 향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우리 근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공주 우금치 전투는 1894년 10월23일부터 25일, 11월 8일부터 11일까지 2차에 걸쳐 벌어진다. 그렇지만 일본의 신식무기로 방어하고 있던 관군과 왜군을 상대로 치열한 격전을 벌인 끝에 애석하게도 공주 감영이 내려다보이는 우금치에서 패함으로써 동학혁명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공주에서 참패를 당한 북접군은 남원 새목터까지 후퇴했다가 소백산맥을 따라 올라오면서 18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른 뒤 보은 북실에서 대학살의 참극을 맞게 된다.

이렇게, 충청도는 동학혁명사의 언저리가 아니라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채길순

소설가 ·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작가의 말>채길순 소설가 &amp;amp;amp;middot;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지난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 대한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다. 그동안 음지에서 고통을 받았던 참여자와 후손들의 명예도 진정으로 회복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은 이제, 후손들에게 정신적 유산으로 길이 보존될 기념사업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학계의 연구가 심화되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주민과지방자치단체들이 중지를 모아야 한다.그러나 보은군에서 2001년부터 보은읍 성족리 일대에 막대한 예산을 들여 추진하고 있는 동학공원조성사업은 실로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보은군은 일방적으로 용역업체와 계약을 체결하고 동학기념공원 조성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형식적인 공청회와 자문위원회를 연 뒤 사업을 강행했다. 이로 인해 제대로 조성돼야 할 보은군의 &amp;amp;amp;lsquo;동학공원조성사업&amp;amp;amp;rsquo;은 공원 내에 국적 불명의 성 모양이 들어서는 등 진실과 다르게 조성되고 있다.
당시 학자와 주민들이 장내리를 사업장소로 선정하지 않고 예산이 북실에 투입되는 것을 문제 삼았으나 군은 이를 묵살했다. 심지어 장내리 취회 장소는 개인 축사와 묘지가 조성되는 등 군의 관심과 관리소홀로 심각하게 훼손되어가고 있다. 학계에서 향토 사적지로 지정해 줄 것은 요구하고 나섰으나 이 역시 "역사적 고증이 미흡하다"는 터무니 없는 이유로 묵살 되었다.
충청도의 동학기념사업은 아직 준비 단계에 있다. 역사의 현장이 명실상부한 정신 유산이 되도록 열린 사업으로 진행 되길 기대해 본다.


<작가약력>

△ 소설가 &amp;amp;amp;middot;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 1955년 충북 영동 출생
△ 청주대 졸업. 청주대 대학원에서 동학혁명의 소설화 과정 연구로 박사학위 받음.
△ 1983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
△ 1996년 한국일보 광복50주년기념 1억원 장편공모에서 옷이야기가 당선
△ 저서 :어둠의세월상&amp;amp;amp;middot;하(장편소설)
흰옷이야기①&amp;amp;amp;sim;③(〃)
동트는 산맥①&amp;amp;amp;sim;⑦(대하소설)

소설 창작의 즐거움(이론서)
소설 창작 여행(〃)
동학혁명과 소설(학술서)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